카를로스 푸엔테스 <블라드> >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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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9578 bytes / 조회: 3,730 / ????.10.05 06:30
[도서] 카를로스 푸엔테스 <블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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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에 익은 작가인데 막상 검색해보니 <아우라>외에는 모르겠다. 국내 번역된 작품도 한 손에 꼽을 정도이고.

그냥 중남미식 이름이 귀에 익은 거려니...

리뷰를 보면 호평일색이다. 132p이면 경장편에도 못미치는 중편인데 이토록 호평이면 뭔가 폭발적인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다는 얘기일텐데 그런 것치고는 바깥에서는 또 너무 조용하다 싶고.

주문 결제를 앞두고 고개를 갸웃하길 여러 차례. 도서관에 검색해봤더니 마침 책이 있다. 그리하여 연휴 전날 대출하고 이튿날 후다닥 읽은 소설. 이로써 온라인 리뷰의 호평 중 '짧은 시간에 금방 읽는다'는 직접 확인했다.

 

다 아는 얘기지만 정작 읽은 사람은 별로 없는 책에 '드라큘라'도 포함되지 않을까. <드라큘라>를 제대로 완독하지 않은 1인이 여기에도 있다. 여담이지만 M이랑 통화 중에 "혹시 트란실바니아라는 도시인지 국가인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안다는 거다. 오, 놀라운데. 감탄하는데 M이 덧붙인다. '악마성 드라큘라'에 나온다고... 1,2초 쯤 후에 말그대로 박장대소했다. M답다. 제목에서 딱 느껴지는 정서가 있어 그거 애니지? 물어보니 게임이라고 한다. 아마 같은 제목의 애니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제목 '블라드Vlad'가 궁금해 검색해보니 막연히 'blood'의 독일식 단어인가 추측했던 것과 달리 대명사로 '블라드 2세 드라큘'로 '드라큘라'의 모델이라고 한다. 그렇다. 이 소설은 '드라큘라' 이야기다. 그것도 헝가리와 루마니아의 국경지에 있는 보금자리를 버리고 작가 푸엔테스의 조국인 멕시코로 거주지를 옮긴 드라큘라의 얘기다.

 

고객의 의뢰를 받은 변호사. 그리고 정체모를 수상한 고객 백작. 초대받은 백작의 성에서 겪는 기괴한 경험.

 

...드라큘라 원작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그동안 애니, 영화, 뮤지컬 등 다양한 경로의 2차 창작으로 접한 사람은 누구나 이 소설이 취한 이야기의 원형이 드라큘라임을 알 수 있다.

 

드라큘라에서 내러티브를 가지고 온 소설은 일단 분위기가 탐미적이다. 타인의 목에 이를 박고 흡혈을 하는 것은 그림 자체가 성적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블라드>는 인물 구도에 아름다운 성인 여성과 (아마도 아름답게 자랄)여자 아이를 등장시키는데 이들이 전면에 나서는 장면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적긴장감을 잘 활용하고 있다. 이를테면 백작의 새집에 다녀온 뒤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를 떨치지 못한 변호사 이브는 아내와 격정적인 잠자리를 갖는데 잠자리 내내 누군가 지켜보는 듯한 위화감을 느낀다. 그리고 직후에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상황을 겪는데 장면을 옮기면 이렇다.

 

나는 침대 밑으로 손을 뻗었다가 깜짝 놀라 곧장 거두었다.

침대 밑에 놓인 다른 손을 건드렸던 것이다.

길고 매끄럽고 유리 같은 손톱이 달린 차가운 손.

나는 심호흡을 하고 눈을 감았다.

나는 하루 일과를 시작할 준비에 들어갔다.

그 순간, 그 차가운 손이 내 발목을 힘껏 잡아채 유리 손톱을 내 발바닥에 쑤셔 박으며 걸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을 느꼈다.

"자거라. 자거라. 아직 이른 시간이다. 서두를 것 없다. 자거라, 자거라."

나는 누군가가 방을 떠나는 기척을 느꼈다.

-p.52

 

위 장면을 읽으면서 단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작가라는 인상을 받았다. 영화로 치면 편집을 잘하는 감독이라고 할까.

해체해서 보면 별 거 없는 평범한 문장인데 유리, 손톱, 매끄럽고, 차가운- 등의 단어들이 모이니 전체 문단에서 느껴지는 건 의외로 치명적이고 차가운 관능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온라인서점의 호평 가득한 리뷰에 못미치는 느낌이다.

일단 호러 고딕 장르치고는 이야기가 지나치게 평면적이다.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장면도 탄산이 빠진 음료처럼 미적지근하고. 비교적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는 이브 나바로의 현실을 감안하면 그의 인생에 일생일대의 대단한 비극이 벌어졌는데도 정작 독자 입장에서 비애감을 그닥 느낄 수 없다. 하물며 1인칭 시점인데도 그렇다. 평범한 단어로 치명적인 문장을 만들어낸 것과 달리 시점의 특징은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느낌. 원형에서 빌려온 이야기의 한계라고 할지, 어두운 허공 높이 치솟아 정점에서 터져야 할 불꽃이 불발되는 장면을 본 기분이다.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은 장면은 과거 블라드 백작의 악행. 이 악행의 전말만 가지고도 굉장한 내러티브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여담이지만 이 파트를 읽으면서 좀비 사진은 정면으로 못 보면서 텍스트로 구현되는 온갖 잔인하고 엽기적이고 구역질나는 장면은 감정적 동요 전혀 없이 무덤덤한 본인의 텍스트불감증을 새삼 확인.

 

그리고 번역의 문제인지 아니면 원래 문장이 그런 것인지, 이브 나바로와 수리나가(로펌 사장), 이브와 백작 블라드의 대화가 지나치게 현학적인 탓에 지적 대화의 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것도 단점. 은유와 복선이 함축된 이런 대화는 좀 더 친절해도 좋다.

다음은 와중에 시선을 끌었던 대화.

 

"당신도 아시겠지만, 친애하는 이브 나바로 씨, 오래 살아 이로운 점은 상황이 허용하는 바에 대해 더 많이 배울 수 있다는 거요."
"상황이라고요?" 나는 수리나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하지 못해 고지식하게 되물었다.
"물론입니다." 수리나가가 길고 창백한 손가락들을 모았다. "당신은 어느 명문가에서 몰락했고, 나는 어느 이름도 없는 부족에서 상승했소이다. 당신은 당신 조상들이 알았던 것을 잊어버렸소. 나는 우리 조상들이 몰랐던 것을 배우고자 결심했소이다."
-p.19

 

위 대화는 과거에서 온 사람이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이야기로 이보다 적절할 수 있을까 감탄했던 대목.

 

결론은, 이야기의 원형을 재창작한 시도는 흥미로우나 그를 제외하면 새로운 게 없는 아쉬움이 남는 한 권이었다.

 

+ 책장을 덮은 직후 제일 먼저 한 일은 책장에 꽂혀있는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검색한 일. <주석달린 드라큘라> 외에 펭귄판이 있다. 전집 구매를 선호하지도, 추천하지도 않는 편인데 이럴 때 전집 구매의 장점을 발견한다. 단권을 살 때는 호불호에 의한 편식으로 책을 거르는 일이 발생할 수 있으나 전집 구매는 자발적인 의지로는 고르지 않았을 책도 언젠가는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 리뷰를 등록하면 영화 <드라큘라 - 전설의 시작(Dracula Untold.2014)>을 볼 예정이다. 한 권의 책이 다른 책으로, 다른 문화 컨텐츠로 이어지는 좋은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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