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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13230 bytes / 조회: 3,441 / ????.04.17 01:25
[도서] 문유석 『쾌락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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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소설을 읽는 재미와 거의 유사한 재미를 느끼며 모처럼 정신없이 읽었던 책이다.

문유석 판사의『쾌락독서』는 제목을 보고 '장정일의 독서일기' 류인가  짐작했던 것과 달리 책에 관한 책도, 저자의 독서담도 아닌 그 책을 읽던 시절 저자의 기억과 추억담이다. 그런데 참 신기하기도 하다. 나와 세대가 다른 저자의 독서 이력이 어찌 그리 베낀 것마냥 나와 닮았는가. 집에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자 친구의 책장, 친척의 책장을 탐하다 서점과 도서관으로 이어지는 유사활자중독자의 노마드 역사를 보고 있노라니 마치 평행세계의 쌍둥이를 보는 기분이다.

 

책을 읽던 중에 M과 통화를 했다. M은 책 『미스 함무라비』는 안 읽었지만(당연하다)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는 봤고, 나는 책도 드라마도 안 봤다. 

긴 수다가 될 것이므로 일단, 네가 본 그 드라마의 원작자가 쓴 다른 책을 읽는 중인데ㅡ, 먼저 고지하고 "영혼의 쌍둥이를 만난 기분이야" 어쩌고저쩌고 부모님 다음으로 내 내력을 가장 잘 아는 M에게 저자와 나의 똑닮은 독서기에 관하여 한참을 떠들었다. 조잘조잘재잘재잘 떠드는 내 말을 웬일로 한참동안 잘 들어주던 M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영혼의 쌍둥이인데 누구는 판사고 누구는……." 그래, 누구는 백수다.71.png

 

책을 읽는 동안 신이 났던 가장 큰 이유는 저자와 내가 읽은 책이 거의 일치하기 때문인데 음... 95% 정도? 겹치지 않는 도서는 저자의 전공과 나의 전공 차이, 딱 그 정도. 

취미와 관심사가 닮은 친구를 만난 기분에 책을 읽은 게 아니라 한바탕 수다를 떤 것 같은 즐거운 여운이 오래 남는다. 

누구나 한번쯤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은가. 정신없이 수다를 떠는 중에 내려야 할 지하철 역을 몇 번이나 지나치는. 

책을 읽는 중에 자꾸만 '나도 나도' 떠들고 싶어서 오히려 독서가 느려지곤 했다. 물론 저자와 떠들 수는 없으니 그때마다 M의 번호를 눌렀다.

 

세대도 성(性)도 성장 배경도 다르지만 같은 책을 읽고 유사한 경험을 하고 유사한 추억을 갖고 있다는 건 공감욕구가 보상을 받는 것 같은 그런 감흥이 있다. 일례로 신일숙 만화를 좋아했던 저자가 지금은 '레 마눌'을 모시고 산다는 대목에서 박장대소할 수 있다던지. 그리고 이런 대목...

 

「열 권 스무 권짜리 책을 잔뜩 쌓아놓고 마루를 뒹굴거리며 매미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책을 읽던, 해가 영원히 지지 않을 것만 같던 8월 여름방학의 나날들이 그립다. -p.85」
 
 

 

돌이켜보면 내가 책을 가장 많이 읽었던 건 하루일과표를 1년 내내 책상 앞에 붙여놓던 십대 시절이었다. 여담이지만 공부하기 전 시간을 쪼개고 계산하는 저자의 버릇을 보며 나 몰래 내가 저자한테 빙의한 줄 알았다. 사실 책을 읽는 내내 표현이나 문장, 내용 등등등 기시감이 잦았다.

 

각설하고, 나는 초등/중등 때 양적으로 책을 가장 많이 읽었는데 이땐 그야말로 없어서 못 읽었다. 당연히 가리는 것도 없었고. 말그대로 닥치는대로 읽던 시기.

나 역시도 세계문학전집 키즈인데, 다만 여기서 세대차이를 느꼈으니 '문고판'이라는 내겐 생소한 개념이 등장한다. 저자에 비하면 나는 문고판, 해적판으로부터 비교적 보호받은(?) 세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차이인지 정말 골고루 읽은 저자와 달리 이 시기 내 독서리스트는 해외문학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입시가 코앞이던 고등학생 때에 비로소 이상문학수상작들을 중심으로 국내작가 소설의 비중이 늘었다. 다만 이런 시차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고등학생 때 읽었던 이문열을 나 역시 고등학생 때 읽었으니 재미있는 우연이다.

 

재미있는 우연이라고 했는데 하물며 고등학생 때 같은 반 반장이 담임한테 항명했던 일화까지도 닮았다.(pp.93-95) 비록 내 경우는 고3이었고, 3주 간 버텼던 반장이 먼저 패배선언을 했다는 차이가 있지만. 이러니 영혼의 쌍둥이 운운할 만도 하지 않은가.

 

평생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으로 저자는 김용의 무협소설을 꼽았는데 '평생 가장 재미있게'는 아니지만 나 역시 김용의 소설을 무척 좋아한다. 김용 시리즈는 출간 순서대로 읽었는데 『녹정기』완독 직후 이 소설을 끝으로 김용이 절필했다는 얘기를 듣고- 그러니까 더 이상 읽을 김용의 소설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한동안 멘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재능있는 작가가 펜을 놓는다니 말이 되나, 의심하며 다시 펜을 잡겠지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작년에 작가의 타계 소식을 접하고서야 비로소 작가의 절필이 충동적인 선언이 아니었음을 실감했다. 작가의 마지막 소설이『녹정기』였던 건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김용의 무협시리즈를 읽은 동기는 전남친과 관련있다. 갑자기 전남친과 헤어지고 나니 하루 24시간이 너무 길고 지루한 거다. 일주일 쯤 지났을 때 안 되겠다 싶어 가장 긴 장편소설이 뭐냐 주변에 수소문했고 김용의 무협시리즈가 간택됐다. 역시 이별엔 시간이 약이다. 그때의 경험으로 나는 이별한 친구에게 소설을 읽으라고 권한다. 가능하면 긴 시리즈로, 이왕이면 무협소설로.

 

'무협소설' 하니 최근 어느 커뮤에서 본 재미있는 글이 생각난다. 무협소설(혹은 영화)에선 왜 싸울 때 꼭 무공 이름을 밝히는 거냐고 누가 묻자 댓글에 누가 'ppl입니다' 라고. 아닌 새벽에 한참 웃었다. 코미디 프로에 하등 재미를 못 느끼는 내가 온라인커뮤를 못 끊는 이유다.

 

노파심에, 이별 후 읽는 책으로 박경리의『토지』는 비추한다. '토지'는 3대에 걸친 연애소설인데 그냥 연애도 아니고 무려 치정이다. 이별 직후 읽기엔 아무래도 쫌 그렇다. 다시 노파심에, '토지가 왜 연애소설이냐!'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토지'는 연애사건을 빼고는 줄거리를 쓸 수 없는 소설이다. ...'토지'를 언급하려니 오랜만에 김환과 몽치가 보고 싶다. 이 둘은 '토지' 전 권을 통틀어 내가 가장 사랑한 인물이다.

 

저자는 미국대중소설의 시작을 시드니 셀던으로 했다고 하는데 나 역시도 그렇다. 참고로 국내대중소설에 재미를 붙인 시작은 김성종이다. 그래선지 시드니 셀던과 김성종은 내게 비슷한 정체성을 가진 작가들로 기억되는데 - 미국의 김성종 한국의 시드니 셀던 식으로, 모두 이모의 책장에서 발굴한 작가다.

 

저자가 언급한 시드니 셀던의 『깊은 밤 깊은 곳에 The other side of midnight』에 잡설을 덧붙이자면, 내게 이 소설은 스토리의 막장성보다 남자에게 일방적으로 버림 받은 후 임신을 알게 된 여자가 스스로 뱃속의 아이를 사산시키는 장면이 전체 스토리를 압도할 정도로 충격적이어서 정작 저자가 감탄한 미국식 거대한 스케일의 막장은 그닥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사실 셀던의 소설은 모두다 스케일이 어마무시해서 으레 그러려니 담담한 것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런 영향이겠지만 재회 후 여자가 복수를 접고 다시 남자를 사랑하게 된 것에 나는 다른 독자들과는 좀 다른 해석을 갖고 있는데, 아마 두 사람의 결말마저도 그녀가 계획한 시나리오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 어렸을 때 읽은 거라 지금 다시 읽으면 다른 감상을 느낄 수도 있다.

 

여담인데 세계문학 키즈 어쩌고 미국대중소설 어쩌고 쓰면서 살펴보니 국내소설 중에는 초등을 포함해 십대가 읽을만한 문학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이 시기의 사촌동생들을 모집단으로 파악해보면 국내소설은 거의 국내 판타지 웹소설에 독서가 편중되어 있는데 그만큼 문학소설의 저변이 얇고 빈약한 걸 알 수 있다. 특히나 하루키를 시작으로 현대 일본사소설이 인기를 끈 이후 자기고백적, 자기성찰적 한국식 사소설이 만연하는 출판 유행이 국내판 본격소설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리게 한 데 일조한 게 아닌가 비판적인 의견을 갖고 있다.

  

세어보진 않았지만 거의 매 페이지마다 몇 권씩 책이 언급됐던 것 같다. 저자가 재미있게 읽은 책은 나도 재미있게 읽었고 저자가 불호였던 책은 나 역시 불호였는데, 다만 하루키는 예외. 그와중에도 하루키의 초기작을 더 좋아하는 건 역시 저자와 통한다.

 

다음은 하루키 챕터를 읽던 중 작가가 나보다 더 닥치는대로 읽었구나 인정했던 대목.

 

(…)하루키 유사품 소설이 쏟아져나왔는데, 그중에서도 내가 압권이라고 느낀 것은 당시 출간된 어떤 소설의 도입부였다. 남자 주인공이 고급 호텔 실내 풀장에서 수영을 하다가 수면 위로 올라오며 "쿠~울"하고 독백하는(진짜다) 장면이었는데, 가히 충격적인 이 부분을 읽으며 세상만사가 대체로 그렇듯 자기 입으로 '쿨'이라고 외쳐대는 횟수는 실제 쿨한 성격과는 정확히 반비례함을 느꼈다. - pp.135-136」
 
 

 

그러니까 길에서 받은 명함도 정독하는 나조차도 이런 책은 안 읽어봤다. 덧붙여 무슨 책의 구절인지 몹시 궁금하다. 

그리고 아래는 불호 키워드와 관련하여 특히 '절절하게' 공감했던 대목...

 

그래서 나는 '인문학 원전 읽기'를 강조하는 이야기들에 회의적이다. - p.168」
 

 

콕 집어 이지성의 스테디셀러『리딩으로 리드하라』는 내가 꼽는 서점가 미스테리 오브 미스테리.

공통 취미인 '독서'를 떠나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챕터는「개인주의 성향의 뿌리」. 더 쓰면 tmi가 될 것이므로 이만 총총하고...

 

이언 매큐언의 『속죄』 챕터를 읽다가 떠오른 생각인데 저자가 직업의 전문성을 살려 문학 속 사건을 현실의 법리적인 관점으로 해석하는 내용으로 책을 한 권 써도 괜찮겠다 싶다. 유익하면서 재미있을 것 같다.

 

리뷰인지 썰인지, 정체성이 모호한 글이 되었는데 사실 이 책은 고상하게 감상하는 책이 아니라 지면 저쪽의 저자와 수다를 떠는 책이다. 나처럼 도장깨기 하듯 활자인쇄본을 찾아 노마드족을 자처해본 기억이 있는 사람에게 일독을 추천한다.

 

육성으로 읽는 판사님의 날 것 그대로의 언어가 때론 질펀하고 때론 즉물적이고 대체로 동네 김씨 아재 같다.

탈권위가 지성을 자유롭게 하는 현장을 엿본 즐거움이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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