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한 쇤메즈 『이스탄불 이스탄불』 >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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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12948 bytes / 조회: 2,626 / 2021.03.10 23:18
[도서] 부르한 쇤메즈 『이스탄불 이스탄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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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은 우리가 고통 받는 곳이 아니다.

우리가 고통 받는 소리를 아무도 듣지 못하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ㅡ만수르 알 할라주

-p.389

 

 

'부르한 쇤메즈'

책을 읽는 동안 종종, 그리고 책장을 덮고 나서 한 번 더. 버릇처럼 작가의 이름을 확인하고 기억한다.

 

이 소설에 대해 하고 싶은 얘기가 많다. 듣고 싶은 얘기도 많고. 

내용과 형식 면에서 '소설'이라는 전통적인 정의에 걸맞는 소설을 읽은 지가 얼마인지 꼽아보게 하는 『이스탄불 이스탄불』. 읽는 내내 이토록 스토리텔링이 강한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에 감동했다.

 

책 소개에 '21세기 고전'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소설을 완독하고 나니 이 표현이 얼마나 적확한가 새삼 공감한다. 장담컨데 이 소설은 오래오래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회자되는 고전이 될 것이다. 또한 그렇게 되길 바란다. 그렇게 되어야 하고.

 

소설이 너무 아름답다. 그리고 너무 고통스럽다. 영상이나 이미지와 달리 텍스트가 구현하는 온갖 표현과 장면에는 비위가 무척 강한 편인데 『이스탄불 이스탄불』은 세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읽는 내내 고통스러웠다. * 왜 세 손가락인가 하면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도 이 소설이 유일하진 않을 것이므로. 

 

모든 생명은 유한하기 때문에 고통에 내성이 없도록 태어났다. 고문은 그 고통을 이용해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자 하는 대표적인 수단으로, 위정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세력들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도구이다. 아마 고문을 금하는 국제 조약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우리 모두가 다 알다시피 유명무실한 약속이다.

 

작가의 이력과 소설 속 배경으로 추측컨대 시기는 아마 2010년 대, 구체적으로 에르도안 집권 중반기 쯤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리와 동시대 인물로 보인다.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고통스럽고 가슴 아팠던 이유 중에는 바로 이런 배경도 있을 것이다.

 

소설은 소위 정치범으로 지하감옥에 갇힌 화자 네 명의 입을 통해 진행된다. 이들은 고문으로 극한에 몰린 육체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돌아가며 이야기를 풀어놓는데 심문 중에 자신의 동료들 혹은 사랑하는 이들의 정보를 누설하지 않기 위하여 상상의 얘기만 나눈다.

 

『이스탄불 이스탄불』이 고전적인 소설 형식을 빌어왔다는 건 이런 전개 방식 때문이다. 

어떤 계기로 인하여 한 장소에 모인 사람들이 상상 속 이야기를 나누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꼽는데 쇤메즈는 화자들의 입을 통해 보카치오를 대놓고 그것도 여러번 언급함으로써 『이스탄불 이스탄불』의 소설적 형식의 출처를 밝히고 있다. 

 

사실 나는 보카치오보다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를 떠올렸는데, 아마 이런 형식의 소설의 계보를 그린다면 '보카치오 - 초서 - 쇤메즈'이지 않을까. 사적 감상으로 내가 그리는 계보는 그러하다.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쇤메즈의 『이스탄불 이스탄불』은 보카치오의 외형적 형식과 초서의 내형적 서술 구조가 문학적으로 진일보한 소설이라고 느꼈고 소설로도, 문학으로도 거의 완벽한 인상을 받았다. 스토리텔링, 서사 구조와 내러티브, 플롯 등 소설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독자의 오감을 충족시킨다. 이제 3월이지만 아마 올해 내가 읽은 그리고 이후 읽을 소설 중 최고의 소설일 것이 틀림없다.

 

목차는 첫째 날부터 열째 날까지 열흘로 나누어져 있고 씨줄과 날줄을 엮듯 화자들의 상상 이야기와 화자들의 사연이 플롯을 이루며 정교하게 서술된다. 작가의 대단한 점은, 화자들의 상상 이야기도 화자들의 현실 이야기도 모두 문학적으로 아름답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난지도에서 핀 이름없는 들꽃의 감동과 여운이 이렇지 않을까.

 

나의 애정은 데미르타이에서 의사로 다시 데미르타이로 넘나들었는데 결국 일격을 당한 건 이발사 카모에게서였다.

다음은 소설을 읽다가 전율했던 장면. 

 

여전히 능글맞게 웃고 있던 심문자는 손에 쥔 진압봉을 마치 장난감인 양 빙글빙글 돌리다가 위로 치켜들었다. 심문자는 내 바로 앞에 있었다. 나는 심문자가 치켜든 손을 한 번에 잡아챘다. 진압봉은 공중에 떴다. 심문자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p.120

 

 

 

'나의 오늘이 누군가는 그토록 원하던 내일'이라는 신파같은 아포리즘이 유독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이스탄불 이스탄불』이 터키 현대사의 한 장면을 고스란히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장면의 주인공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펜의 힘'이란, 가령 이런 것이다.

쇤메즈는 한 권의 소설로 지구 다른 나라에서 터키와 무관하게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던 지구인 1로 하여금 터키의 현대사를 공부하게 했다. 그리고 그들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위정자들을 향한 저항과 투쟁에 관심을 가지고 지지하게 했다.

 

소설은 작가 후기도, 역자 후기도 없이 바로 끝난다. 내겐 그것이 '이스탄불'에 대한 예의처럼 느껴졌다.

 

故신영복 선생이던가, 어느 정치인이던가. 사상범으로 수감되었다가 출소하고 몇 년 후 우연히 길에서 자신을 고문했던 당사자와 마주쳤는데 상대가 머쓱하게 웃으며 인사 비스무리하게 하고 지나치더라는 거다. 길에서 우연히라도 마주치면 멱살을 쥐고 내게 왜 그랬냐고 악을 쓸 거라고 상상했는데 막상 마주치니 그냥 허무하고 기운이 빠지더라고.

 

나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표현을 싫어한다. 그건 마치 죄는 미워하고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일종의 면죄부처럼 느껴진다. 성선설, 성악설을 따지자는 게 아니라 악은 그냥 악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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