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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17371 bytes / 조회: 2,656 / 2021.04.30 12:25
[도서] 이유리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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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을 읽던 중, 저자의 서술에 의문이 들어 몇 자 적는다.

 

 

1. 치마

 

탈코르셋 열풍이 사회를 휩쓸고 있지만, 유독 학교는 무풍지대인 것만 같다. 자유를 가르치려면 여학생에게 바지를 허하기를, 민주를 가르치려면 옷을 통해 여학생을 통제하려는 욕구부터 거두기를. -p.24
 

 

여학생의 교복치마가 사회적 억압이라는 의견에 공감하기 어렵다. 진영에서 제기하는 '여성은 치마, 남성은 바지라는 명제는 성차별'이라는 주장에 관하여는 사회역학 구조 안에서 바지와 치마가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되기 시작한 의복 변천사를 선행적으로 짚어봐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거기까지 언급하면 내용이 너무 길어지므로 생략하기로 하고. 

 

결론을 먼저 말하면, '여학생에게 바지를 허하라'고 할 것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바지와 치마 선택권을 줘라' 하는 것이 보다 민주주의에 근접하는 구호가 아닐까 한다.

 

일단 저자가 제시한 '교복치마'에 집중해보면 이게 굳이 성차별의 산물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의문이 든다. 그러니까 '치마'라는 의복 본연의 기능성을 본다면 말이다.

 

교복치마, 자유, 민주(주의)가 서로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다만.

간단히 말해서,

내가 현재 학교에 다니고 있고 교복을 입는데 나한테 치마와 바지 중 고르라면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치마를 고를 거다. 왜냐하면 치마가 훨씬 편하니까. 편의성과 기능성에서 바지는 치마를 따라가지 못한다. 이동 수업 때 옷을 갈아입는 것도 편하고, 치마가 불편한 상황이 오면 치마 안에 바지를 덧입으면 되니까. 실제로 나는 학생 때 교복치마와 체육복 바지를 거의 비슷한 비율로 입었다.

 

저자의 관점이라면 사회적 합의에 의해 바지 밖에 선택권이 없는 남학생들이 옷으로 인해 받는 억압이 더 강할 수도 있다. 남학생에게 치마를 허하라는 선언은 왜 안 나오는 걸까. 같은 논리라면 이 역시도 성 역할을 강제하는, 더 없이 상징적인 젠더 폭력이 아닌가.

 

한때 코르셋이 여성의 신체를 어떤 식으로 누르고 조였는지 문제를 제기하는 코르셋 담론이 활발했는데 담론 자체는 동의하나 그러한 담론의 목적이 의복으로부터 여성을 해방해야 한다는 것이면, 그런 주장이 힘을 얻으려면 코르셋의 기능성과 편의성에 대한 담론도 함께 따라야 한다. 이 얘기를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로 좁히면, 코르셋과 코르셋의 기능을 필요로 했던 가슴과 허리를 강조하는 치렁치렁 드레스가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었던 당시 세태와 풍속에 관하여도 짚어줘야 된다는 의미다. 세상의 모든 여성이 코르셋과 실크 드레스를 입은 건 아니지 않은가. 다른 한편, 세상의 모든 여성이 코르셋과 실크 드레스를 원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 설명대로라면 프라고나르의 그림 속 소녀는 볼록한 소매, 이리저리 접힌 치맛자락, 목에 두른 풍성한 주름의 칼라렛 띠, 무엇보다 가슴과 복부를 사정없이 누르는 코르셋의 방해를 받아가며 책을 읽고 있는 셈이다. 그런 그녀에게 작고 가벼운 책은 최선이었다. -p.20
 

 

마찬가지로 18세기 그림 속 여성이 작은 책을 손에 쥐고 있는 까닭이 코르셋과 드레스 때문이라는 저자의 의견이 공감을 얻으려면 당시 그림 속 남성은 여성과 다르게 큰 책을 쥐고 있었다던가, 당시 책의 판형이 어떻게 소비되었는가 등 다른 비교 자료가 필요하다. 참고로 이건, 당장 기억은 안 나지만 그림 속 성인 남성이 작은 책을 들고 있는 그림을 여성이 들고 있는 것만큼이나 보았기에 하는 말이다.

 

참고로 저자가 예시를 든 프라고나르의 <책 읽는 소녀>는 1769년 작인데(p.21), 불과 8년 뒤 1777년 테르부슈의 <안경을 쓴 자화상>(같은 책 p.233) 속 여성은 고래뼈 없이도 역시 문고판 크기의 소설책을 읽고 있다. 저자에 의하면 그림 속 여성인 테르부슈는 '아름다움과 젊음을 내세울 필요 없는 천재프로화가'이며 그림 속 소재로 보아 '평소에도 꾸준히 책을 읽는 사람'이다.(p.234 인용) 

 

 

19세기 말 자전거가 유행하며 여자들도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는데, 드레스 자락이 바퀴에 말려 들어가 다치는 일이 많았다. 그제야 남성들은 여성의 바지 착용을 '안전을 위해' 마지못해 묵인했다. -pp.21-22 
 
이처럼 바지는 여성들에게 해방의 상징이었으나, 그 때문에 남성들은 여성의 바지 착용을 불편한 눈으로 보았다. 드레스에서는 그 흔적이 얼마 전까지 남아 있었다. (…) 코르셋 착용부터 치마 교복까지, 가부장 사회는 옷을 통해 여성에게 인형처럼 가만히 있으라는 주문을 주입해온 것인지도 모른다. -p.22 
 

 

글쎄, 치마가 정말 억압의 목적 즉 헤게모니의 영역이었다면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바지를 허용하는 대신 자전거를 빼앗지 않았을까. 

 

 

 


 

2. 여성의 적은 여성 

 

불행한 얘기지만, 여성의 적은 여성이 맞다. 여기서 말하는 '적'이 '경쟁을 거쳐 상대를 물리치고 차지한다'는 함의를 품고 있다면.

일례로 '내 남자가 바람난' 상대는 (대체로)여성이지 않겠는가. 남성과 여성이 미모를 겨루지도 않으며, 남성과 여성이 스포츠에서 기량을 겨루지도 않는다.

이는 명제의 주체를 남성으로 바꿔도 마찬가지다.

 

어린 딸에게 《백설 공주》를 읽어주는 엄마가 된 이제는 알겠다. 마법 거울의 목소리는 '가부장의 목소리'인 것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판정하는 사람은 남성이며, 이 목소리가 여성들 사이에 분란과 갈등을 만든다는 것을." -p.25
 

 

거울의 목소리가 왜 남성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한 건 나뿐인가. 여초 게시판을 보면 마트에서 거리에서 지나쳐간 다른 여자들 품평이 넘쳐나더구만. 여튼.

 

백설공주에 관하여ㅡ. 

저자의 주장이 힘을 얻으려면 왕비는 애초에 거울에게 질문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 자신의 예쁨을 타자에게 확인받고자 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 '내가 제일 잘 나가' 믿고 살면 그만인데 왜 왕비는 굳이 거울에게 확인받고자 했을까. 인간 누구나 갖고 있는 인정욕구 때문이다. 거울이 잘못한 게 있다면 거짓말을 안 했다는 거다. 진실은 원래 뼈아픈 법이다.

팔순 할머니도 '곱다' 소리를 들으면 환하게 웃는다. 나더러 예쁘고 곱다는 데 싫을리가 있겠는가.

 

왕비가 공주를 시기해 죽일 결심을 하는 건, 공주가 왕비보다 더 예뻐서가 아니다. 

왕비가 거울에게 '누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냐' 물었을 때 언제나 '왕비님'이라고 대답하던 거울이 어느 날 대답한다. '지금은 왕비님이 제일 예뻐요'. 그리고 마침내 거울이 '백설공주가 제일 예뻐요' 왕비의 뒤통수를 친다.

 

더 예뻐질 수는 없다. 더 예쁜 미모도 없다. 예쁜 건 그냥 예쁜 거다. 

그럼 뭐가 변한 걸까. 변한 건 세월이다.

왕비는 늙어가는 예쁜 여자고, 백설공주는 한창 때의 어리고 예쁜 여자인 거지. 

 

어리고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건 만국공통 동서고금이다. 남자 욕할 거 없다. 

'어리고 예쁜 여자'를 '젊고 잘생긴 남자'로 바꾸어도 마찬가지이므로. 

 

예쁜 게 문제였다면 왕비는 외모를 가꾸는 데 몰두했거나 공주의 외모를 망치는 데 몰두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 공주를 없애는 선택을 했던 건 왕비가 공주의 예쁨이 아니라 젊음을 시기했기 때문이다.

 

늙어가는 것에 대한 인간의 공포는 더 언급할 필요가 없으리라 본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금 이 시간에도 노화 방지 기능성 화장품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3. 현모양처에 관하여

 

이건 예전부터 생각하던 것인데 현모양처를 꿈꾸는 여성의 욕망을 '남성의 오랜 세뇌에 길들여진 덜떨어진 자아'라고 함부로 판단해선 안 된다. 그런 판단은 오로지 본인만이 할 수 있다. 사회에서 경쟁하며 성취를 이루는 것이 행복의 전부인 여자가 있듯이 아이를 키우고 집안을 가꾸고 가족에게 맛있는 음식을 요리해 먹이는 것이 행복의 전부인 여자도 있으므로. 하물며 현대에 와서는 가사를 완벽하게 '노동'으로 규정짓고 있지 않는가. 어느 배우는 이혼 위자료로 자신의 가사노동을 일당으로 계산해 전남편에게 3년 치를 받았다던데. 가사는 노동이라고 사회적 합의가 끝났음에도 가사를 잘 하는 여성은 가부장 사회에 매몰된 수동적이고 타성적인 인격으로 규정짓는 것이야말로 여적여의 또다른 형태가 아닐지.


 

마리 니콜 베스티에는 화가의 딸이었다. 물감 냄새가 배어 있는 집에서 자라서인지 그녀는 자연스레 붓을 들었다.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은 딸이었으니, 어쩌면 화가로서 명성을 날리겠다는 야망을 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혼 후 그런 자회상에서 그녀는 웬일인지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모습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캔버스에 한창 그리고 있는 초상화는 남편 프랑수아 뒤몽, 남편의 시선 아래에서, 베스티에는 그림을 그리는 동시에 아들을 돌본다. 마치 자신의 본분은 '현모양처'라는 걸 잊지 않았다는 듯이. -p.36 
 

 

이후 저자는 마리 니콜 베스티에가 왜 저런 그림을 그렸을까 추측하는데 내가 고개를 갸우뚱한 건 '남성의 시선을 의식했을 것(p.36)'이라는 저자의 추측이다. 현모양처의 본분이라는 건 도대체 뭘까. 마리 베스티에가 현모양처보다 화가의 길을 더 원했을 거라는 저자의 추측의 근거는 무엇인가. 내겐 무명이나 마찬가지인 마리 니콜 베스티에를 굳이 포털에서 손품 팔아 검색한 이유는, 책에 예시된 자화상 속 '현모양처'인 마리 니콜 베스티에가 저자의 짐작과 달리 딱히 불행해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내 포털을 검색하니 온통 이 책의 저자가 쓴 내용 뿐이라 해외 포털에서 뒤졌더니 프랑스인이어서인지 위키몽드(Wikimonde)에 그나마 내용이 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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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결혼 후 본인이 그린 자화상, 아래는 결혼 전 아버지 안톤이 그린 마리 베스티에의 초상이다.


마리 베스티에는 미니어처 화가이자 초상화가인 안톤 베스티에의 딸로 태어나 아버지 일을 돕다가 역시 부유한 미니어처 화가와 결혼한다. 이후 살롱에 한동안 그녀의 그림이 전시되지는 않았으나 꾸준히 그림을 그렸던 걸로 보이고 시간이 좀 지나서는 간간이 그림을 전시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슬하에 2남 1녀가 있었고 아이들이 장성해서 시집 장가 가는 것도 다 지켜봤으며 죽어서는 생전에 남편이 마련해둔 땅에 묻혔다고 하니 평탄하게 살았던 걸로 보인다. 그닥 유명인물이 아니라 세세한 기록이 없어 실제 속사정은 알 수 없지만 연대만 본다면 그냥저냥 잘 살았던 것 같다.

 

그림 한 장으로 그들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으나 어쨌든 결혼 후 그녀의 신상이 딱히 더 불행해 보이지는 않는다. 저자는 무엇을 보고 재능있는 그녀가 결혼으로 인해 화가로서 사회적 성취를 이룰 기회를 박탈당한 불운아라고 판단한 걸까.

 

 

 


 

예전에 영화인지 칼럼인지에서 본 건데,

병원에 환자가 찾아와 몸 여기저기를 누르며 여기도 아프고, 저기도 아프고, 거기도 아프고... 하소연을 하니 가만히 지켜보던 의사가 진단을 내린다. 환자분은 손가락이 아프시군요.

 

사회운동가에게 필요한 미덕은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혹은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고 인정할 수 있는 유연한 방향성이다. 세상과 사회와 인간을 보는 시각은 언제나 유연해야 한다. 신념과 아집은 한끗 차이이기 때문. 답을 정해놓고 벌이는 담론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차피 건강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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