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돈 『모든 것은 영원했다』 >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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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13478 bytes / 조회: 2,118 / 2022.03.25 17:17
[도서] 정지돈 『모든 것은 영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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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에 앞서, 

작가의 산문과 소설을 연이어 읽은 소감 중 굳이 언급하고 싶은 건 '작가가 막 던진다'는 거다. 

보다 부드럽게 표현하면, '작가가 막 던지는 것 같은데?' 

 

이를테면 이런 문장.

 

정치적 해방은 한편으로 인간을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 이기적인 독립적 개인으로 환원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을 공민으로, 도덕적 인격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현실적이고 개인적인 인간이 추상적 공민을 자기 안으로 흡수하고, 자신의 경험적 삶 안에서, 개별적 노동 안에서, 개별적 관계 안에서 개별적인 인간으로 유적 존재가 될 때에야 비로소,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힘"을 사회적 힘으로 인식하고 조직함으로써 사회적 힘이 더 이상 정치적 힘의 형태 안에서 그 자체로 분리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인간 해방이 완성된다. -p.118 


참고로 '공민'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발췌 문단은 병렬식 구성을 취하는데 A is B, A is C, A is D 식이다. 특히 첫 문단은 서술부가 주부를 정의하는 형태인데 독자는 이 문장을 이해하기 위하여 B, C, D 즉, '시민사회의 구성원', '이기적인 독립적 개인', '공민', '도덕적 인격'을 한번 더 읽어야 된다. 문제는 작가가 선택한 어휘다. 모호하고 관념적이고 현학적인 단어들은 의미를 갖추기도 전에 지리멸렬하게 흩어진다. 한 예로, '이기적인 독립적 개인', '추상적 공민'은 도대체 뭘까 싶은 거다.


발췌한 내용을 정리하면, '정치적 해방으로 인간의 개인성이 강화되고 그 개인성이 정치적 힘의 영향을 받지 않을 때 비로소 인간 해방이 완성된다' 정도로 읽을 수 있겠다. 아, 우리글도 독해를 해야 하는 현실이라니...ㅠㅠ


작가가 '막 던지는' 것 같은 태도는 앞서 읽었던 산문 『시와 산책』에서도 종종 느낀 것인데 살코기는 감추고 지방만 발라내어 늘어놓는 현학적인 태도는 작가의 글쓰기 특성을 논하기에 앞서 일단 아쉽다. 일개독자 주제에- 라고 한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만, 그럼에도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정지돈은 오랜만에 만난 썩 마음에 드는 우리말 작가이기 때문. 덕분에 근 몇 년 만에 다른 국내 작가의 책을 찾아보고 있다.

 


/



현앨리스, 현피터, 정웰링턴, 선우학원...

『모든 것은 영원했다』 에는 우리 역사의 한 장에 실존했던 인물들이 등장한다. 

 

소설을 읽는 동안 종종 기시감을 느꼈는데, 정지돈의 소설을 읽으면서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를 함께 읽는 기분을 느낀 배경은 두 소설 모두 근대로 넘어오는 시기에 조국을 떠나 타국을 떠도는 인물들을 통해 공통적으로 천착하는 정서 '외로움'에서 기인한다.


한 세상이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는 격변기에 던져진 어떤 인간은 필연적으로 유목민이 된다. 자처했든, 강요당했든 유목의 길에 나선 그들은 매일밤 외로움을 이불 삼아 덮고 자고, 외로움과 어깨를 걸고 낯선 거리를 걷는다. 자신의 그림자와 싸우는 인간은 끊임없이 실존을 의심하고 회의한다. 이것은 필연이다. 그리고 불안에 직면한 외로운 인간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너무나 적다. 이것 또한 필연이다.


"스무 살에 혁명가면 마흔 살에는 살아 있기 힘들겠군." -p.25 


 

 

미국에서 만나 친구로, 동지로 지내다 북한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 체코로 함께 건너온 선우학원과 정웰링턴은 북한으로부터 입국을 거부 당한다. 이후 선우학원은 미국으로 돌아가고, 정웰링턴은 체코에 남는다. 

 

선우학원은 그날의 만남이 결정적이었다고 했다. 공산주의에 대한 회의, 이론에 대한 회의, 제도에 대한 회의, 인간에 대한 회의, 미래에 대한 회의. 세계를 이해하려 들면 믿음은 깨어지기 마련이다. 세계를 바꾸려 드는 사람만이 믿음을 유지할 수 있다. 그제야 선우학원은 마르크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고 마르크스와 멀어질 수 있었다. -p.67 

 

 

 

믿었던 세계에 대한 회의가 날선 신념의 틈을 비집고 파고들었을 때 정웰링턴과 선우학원의 선택을 가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마도 혈육을 향한 애착이지 않았을까. 미국 시민권자인 현앨리스는 이혼 후 LA로 갔고 그곳에서 정웰링턴을 낳았다. 이후 남한과 미국을 오가다 양국으로부터 추방 당하고 북한에 정착하는데 현앨리스가 북한으로 건너간 이후 두 모자는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현앨리스는 1956년 박헌영과 함께 숙청 후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졌고 정웰링턴은 1963년 근무하던 병원에서 독극물을 삼키고 생을 마감했다.

 

나는 삶에도 마르크스주의에도 빚지지 않았다. 하와이의 한인 사회에도 상하이의 독립운동가들에도 부채가 없고 어떤 이념과 철학에도 빚지지 않았다. 반면 그들은 내게 많은 빚을 졌다. 우리 가족에게도 빚을 졌고 친구들에게도 빚을 졌다. 나는 어떤 것도 돌려받지 않을 것이다. 윌리는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세계와 사람들은 혼란스럽다. 나는 가까운 시일 내에 죽을 것이고 사람들이 이를 자살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어에 불과하고 나의 선택은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언어와 숫자, 개념 따위로 수렴되지 않는 것이다. -p.132 

 


 

체코에 정착한 정웰링턴은 서방세계에서 북한으로 입국하는 사람들을 돕는다. 그 과정에서 안나를 만나 결혼하는데 애정과 별개로 두 사람이 세계를 보는 관점은 판이하다. 정웰링턴은 결정론적 관점으로, 안나는 비결정론적 관점(불확정성의 원리)으로 세계를 보는 것이다. 

 

반면 정웰링턴은 우연을 세계와 생명의 근본 원리로 볼 수 없었다. 그의 가족의 삶은 의지적인 삶이었다. 의지적인 삶이 우연의 작동에 의해서 파멸로 이어졌다는 말은 의지의 무의미함을 의미했고 그건 곧 자신과 가족의 삶이 무의미함을 뜻했다. -p.21 

 



이로써 정웰링턴이 코뮤니스트인 것은 확실하다. 변증법의 3요소이자 요체인 정반합(正反合 : These, Antithese, Synthese)을 초간단 요약을 하면 정과 반의 갈등으로 합이 탄생한다는 이론인데 마르크스는 역사를 정반합의 끝없는 발전 순환으로 보았다. 그러니까 태초에 正이 있고, 정의 역반응으로 反이 등장하고 정과 반 사이에 갈등이 증폭되다 새로운 合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 합은 시간이 흐르면 정이 되고, 반이 등장하고, 합이 탄생하고... 무한반복된다. 여기에서 특기할 것은 정과 반이 대립/갈등하는 과정에 인간의 의지가 필연적으로 개입하고 그 결과 합이 이루어진다는 거다. 즉 결정론적 세계관이다. 덧붙여 마르크스는 제정시대 왕족/귀족과 농민이 대립하고 이 대립이 정점에 이르면 민중 봉기가 일어나 제정이 무너지고 새로운 형태의 세상으로 이행이 이루어진다고 역사의 흐름을 예언했다.


+) 의지(意志)는 철학에서 넓은 뜻으로는 무엇인가를 하려는 마음의 작용을 가리킨다. 

 

 

의지적인 인간이었던 정웰링턴은 세계를 결정론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으며, 정웰링턴에겐 의지적인 시민이 주체가 된 사회가 사회주의로 가는 것은 역사 발전의 필연적인 흐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체코에서 머물며 자신의 손으로 북한으로 사람들을 보내는 과정에서 정웰링턴의 의지는 점차 무중력 상태가 된다.

 

죄가 있다면 죗값을 치르고 나올 텐데 죄가 없는데 어떻게 한단 말인가. 설명이나 저항을 하려 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어느 날 잠에서 깨어 투정을 부리는 내게 『다니엘서』 6장에 나오는 사자 굴에 빠진 다니엘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런데 사자들은 그를 해치지 않았단다. 왜냐하면 다니엘이 사자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무슨 말인지 알겠니? 두려워 말고 의심하지 말거라. 그런데 사자들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아나요? 피터는 물었다. 아버지는 말했다. 사자들은 그 사실을 알 필요가 없단다. 중요한 건 너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거야. 현피터가 말했고 정웰링턴은 더 이상 종교를 믿지 않게 된 이후에도 그 이야기를 잊지 않았다. (pp.90-91) 

 

 

 

책은 모두 207페이지이고 그중 2/3는 소설이며 나머지는 작가가 체코에서 정웰링턴의 족적을 훑는 기행기다. 즉 소설+산문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종종 해방 후 북한을 선택했던 지식인들의 선택이 궁금했는데 정지돈은 그 이유를 이렇게 쓰고 있다. 


2000년 송환된 비전향장기수 김석형은 해방정국에서 월북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지식인, 예술인이었고 월남하는 사람들은 장사꾼들이었다고 말했다. (…중략)

해방 이후 북한을 택한 작가들의 존재는 월북이 필연적인 선택이었음을 역설한다. 식민지 시절 최고의 문장가이자 단편소설가였던 이태준은 카프나 공산주의자들과 교류하지 않는 문학주의자였다. 그는 1943년 철원의 안협에 칩거해 낚시와 독서를 하며 소일했지만 해방 후에는 남로당에 가입하고 북한으로 향했다. 최인훈은 『화두 』에서 이태준의 선택을 공산주의와 북한이 아닌 일종의 도피이자 망명으로 해석한다. 쉽게 말해 이태준은 친일 관료들이 한자리 해먹는 남한을 참아줄 수 없었다는 것이다. (pp.141-142)

 

동시대에 친일매국하던 놈들이 해방 조국에서 호의호식하는 꼬라지가 얼마나 보기 싫었을까. 하여간에 친일 청산이 문제다. 친일매국인을 청산하지 못한 과거가 과반세기가 넘은 현재까지도 대한민국민에게 청구서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완독 직후 구글 검색을 했다. 작가의 상상이 빚은 가상 인물이 아닌, 역사에 분명하게 흔적을 남겼던 인물들을 확인하니 울적하다. 울적한 이유는 당연히 21세기 현재 대한민국이 건강하지 못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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