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J.D.샐린저『호밀밭의 파수꾼』 고전의 힘이란 이런 것인가.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으면서 그 동안 잊고 있었던 고전이 주는 사유의 깊이에 새삼 매혹당했다.
원래 베스트셀러는 능동적 혹은 자발적으로 챙겨서 읽지 않는 편이다.
이유 하나. 귀에 너무 익은 데서 오는 기시감(아는 얘기 같고, 이미 읽은 것 같은).
이유 둘. (90년대 후반 이후에 적용되는 건데) 출판사측의 홍보와 마케팅이 만들어 낸 알고 보면 속 빈 강정이라는 얼마쯤의 편견 때문.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기 직전, 얼핏 스쳤던 생각 하나. 이건 전체 고전에 해당하는 의문인데 과연 시대와 사상이 다른 50년 전에 출판된 소설을 오늘을 사는 내가 과연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건 정말 바보같은 생각이다. 나흘에 걸쳐 책을 다 읽고 손에서 내려놓던 순간 해일처럼 밀려오던 그 감동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무엇을 읽는가에 따라 독서가 주는 즐거움도 다르다. 예를 들면,
재미있는 시트콤을 보듯 매 페이지를 읽을 때마다 재미있어서 깔깔 대고 눈을 반짝이게 하는 소설이 있는가 하면, 라디오 방송을 듣듯 별다른 감정의 기복 없이 페이지를 넘기다가 수 백장의 페이지가 한 권을 이루는 순간 완성된 퍼즐을 보듯 가슴이 벅찬 감동이 밀려오는 소설이 있다. 고전의 경우 주로 후자에 속한다.
책을 읽기 전 제목에서 연상한 것은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얘기가 아닐까 했다.
책의 중반을 넘어서 종반에 이르기 직전 즈음엔가, 주인공 홀든이 너무도 귀여워하는 여동생 피비가 홀든에게 '오빠는 무엇이 되고 싶어?'라는 질문을 한다. 홀든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어.'라고 대답한다. 사실 홀든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필요로 하는' 소년이다.
예민하고 섬세하고 상처받기 쉬운 자아를 가지고 있는 사춘기 소년이 홀든은 누군가가 자신의 파수꾼이 되어 주길 바라는 자신의 소망을 은연 중에 표현한 것이다. 소설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회전목마 위에서 환하게 웃는 피비를 보면서 따라 웃는 홀든. 딱히 특별한 반전이나 가슴을 후벼파는 명대사가 등장하는 것도 아닌데 이 부분에서 그만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눈가가 따끔해지고 말았다. 어쩌면 피비야 말로 홀든의 파수꾼이 아닐까.
'익명성은 작가 고유의 자산'이라는 말을 남기고 지금껏 은둔 작가로 살고 있다는 샐린저. 이 소설에 반해서 국내에 번역이 되어 있는(문학동네) 그의 나머지 소설을 당장 구입했지만 먼저 읽은 <호밀밭...> 여운이 아직도 남아서 다른 소설은 차마 읽지 못하고 있다. 붓 끝의 힘은 정녕 세치 혀의 힘보다 강하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딘가에서 '파수꾼'을 꿈꾸고 있을 이 시대의 홀든들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