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돈 『내가 싸우듯이』『야간 경비원의 일기』 >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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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9353 bytes / 조회: 341 / 2023.10.02 14:57
[도서] 정지돈 『내가 싸우듯이』『야간 경비원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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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싸우듯이』는 단편집, 『야간 경비원의 일기』는 장편.

 

『내가 싸우듯이』는 작가의 등단작을 포함 초기 단편집인데 소설 간 편차가 좀 있다. 어떤 소설은 괜찮았고 어떤 소설은 이게뭐야 싶고. 이 소설집은 크게 『장』과 『우리들』로 구성을 나누었는데 수록 단편이 따로 또 같이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덕분에 한 편을 읽은 것 같기도 하고 여러 편을 읽은 것 같기도 한데 그중에서도 『장』은 (성인지 이름인지 알 길이 없는)'장'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연작 소설로 봐도 무리가 없다. 다만 연작이라고 하여 이어지는 이야기는 아니고 각 단편은 독립적인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는데, 장이라는 인물이 이 장소, 이 사람들 틈에 있거나 다른 장소, 다른 사람들 틈에 있거나, 중심인물이거나 주변인물이거나 하는 식이다. 부연하면 각 단편마다 장이 등장하지만 장을 제외한 단편의 나머지 인물들은 서로 연관도 없고 겹치지도 않는다. 자연히 장에 대한 묘사도 단편마다 다르다.

 

가장 괜찮았던 단편은「창백한 말」「미래에서 온 책」(와- 나 카페베네 결말을 좋아했네)

나는, 소설은 어쨌든 소설의 형식 그중에서도 반드시 서사와 플롯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꼰대인데 언급한 두 단편은 내 기준 그나마 소설의 형태를 하고 있다. 보태자면 지금까지 읽었던 정지돈의 단편 중 가장 괜찮았다.

 

정지돈의 소설을 연이어 읽다보니 작가의 글쓰기 특징이 보이는데 한줄로 요약하면 '팩션+나무위키'라고 할 수 있겠다. 문제는 이런 방식이 처음엔 신선하고 흥미로웠는데 거듭 계속되니 피로감이 쌓인다. '모르면 약'이라고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 낯설면 소설이 무난하게 읽히겠으나 그렇지 않고 아는 인물이면 독서 내내 시험받는 기분과 씨름해야 한다. 이게 왜 피곤한가 하면 실존인물의 진짜 이야기일 때도 있고 실존 인물의 가짜 이야기일 때도 있고 실존인물의 이름만 빌려올 때도 있고... 이러니 소설이 피곤할 수 밖에. 와중에 쓰는 작가는 편했겠다 했다.

 

내가 읽은 정지돈의 소설은 대부분 실명을 가져와서 픽션과 섞은 팩션인데 이번에 읽은 소설도 마찬가지. 그나마 『내가 싸우듯이』는 해외 인물과 사건이라 그냥저냥 읽었는데 국내인 실명을 가져다 쓴 『야간 경비원의 일기』는 책을 읽는 내내 방지턱을 넘어야 했다. 방지턱의 정점은 시인 이성복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소설에 등장하는 시 모임 부터가 좀 뜬금없는데 시 모임이 있고 이성복이 있는 게 아니라, 이성복이 등장해야 하므로 시 모임이 생긴 느낌 같은 느낌이랄지. 그래, 이건 그냥 기분 탓일 수도 있다. 

초고 과정에서 들어갔는지 탈고 과정에서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작가는 이성복 시인의 실명을 쓴 것에 대해 화자의 입을 빌어 언급한다.

 

이름과 필연

이성복 시인의 이름을 쓴 것에 대한 정중한 이의 제기가 있었다.

우선 읽어주셔서 감사하다.

답변을 드리자면


1. 글에 등장하는 이성복은 실제 시인 이성복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2. 이런 걸 굳이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3. 관련이 있다 한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4. 이제 그는 다시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pp.110-111, 『야간 경비원의 일기』

 

 

제목이 '일기'이니만큼 결말에 이르기 전에 일기 형식으로 '이름과 필연'을 빌어 실명을 거론한 것에 대해 언급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기분이 묘했다. 말하자면 실명 당사자에게 두 번 엿을 먹이는 현장을 보는 기분이랄까. 부정적인 의미로 MZ 냄새가 나는 것도 같고. 그야말로 '그래서 어쩌라고' 투가 아닌가.

몇 년 전 문단에 '고은 시인 미투' 광풍이 지나간 풍토에서 독자라면 소설에 등장하는 실명으로부터 과연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혹시, 만약, 작가가 정말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한다면 굉장히 무책임한 태도다. 어떤 오염은 장시간 지워지지 않거나 결국 평생 흔적으로 남는다. 정지돈이 이성복 시인에게 한 건 모퉁이 뒤에 몸을 숨기고 투척한 오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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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돈 소설의 특징이 '나무위키+팩션'이라고 서두에 썼는데 정지돈의 소설은 한결같이 나무위키의 인물과 사건을 읽는 기분이 든다. 다른 독자는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해서 온라인서점에 접속했는데니 놀랍다, 콕 집어 '나무위키'를 언급한 리뷰가 있는 게 아닌가. 역시 생각과 느낌은 다 거기서 거기인 모양. 여하튼 이런 방식이 처음엔 신선했으나 이것도 약발이 다 했는지 슬슬 불감의 경지에 이른 것을 느낀다. 아직 읽지 않은 신간 두 권이 책장에 꽂혀 있는데 걱정이다. 예상컨대 정지돈은 계속해서 이런 구성으로 소설을 쓸 것이다. 운동 선수가 몸에 밴 습관을 고치지 못하는 것처럼 애초에 일종의 공식을 세우고 글을 쓰기 시작한 작가는 그 공식을 버리고 다른 방식으로 쓰지 못한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 예외도 있을 거다.

 

 

니콜라이 부리오는 W.G.제발트를 지목한다. 차이는 있지만 부리오가 지목한 제발트나 데이비드 실즈, 엠마뉘엘 카레르는 의도가 무엇이든지 달라진 형태의 문학 행위를 보여준다. 데이비드 실즈는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2014)에서 이렇게 쓴다. "나는 위대한 인물이 방에서 홀로 걸작을 쓴다는 생각을 이제 믿지 않는다. 내가 믿는 것은 병리학 실험실, 쓰레기 매립지, 재활용 센터, 사형선고, 미수로 끝난 자살 유언장, 구원을 향한 돌진으로서 예술이다." 그는 소설가였지만 어느 순간 픽션 쓰기를 그만둔다. 그는 자신이 끌어 모은 온갖 잡다한 메모와 기억을 콜라주한다. 그의 글은 논픽션인가, 에세이인가, 자서전인가. 이건 그냥 책이다.

 

-p.289, 일상/기록/스크립트 『내가 싸우듯이』

 

소설가 정지돈이 쓰고 싶은 건 '그냥 책'인지도 모르겠다. 근데 나는 작가의 이런 태도가 포스트하게도 모던하게도 보이지 않는다. 그냥 사춘기가 늦게 온 중년의 철지난 푸념처럼 보인달까.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만약은 세상에서 가장 무의미한 말이다. 만약에 당신에게 만약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말은 믿지 마라. 만약이란 욕망을 비추는 거울이다.

 

-p.233, 『내가 싸우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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