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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20084 bytes / 조회: 262 / 2023.10.21 01:36
[도서] 혼자서 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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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말에 의하면 정희진은, 

'여성주의·평화 연구자. 젠더, 섹슈얼리티, 고통, 언어, 탈식민주의 등에 관해 다수의 책을 썼다.'


 

'정희진 쌤'이라고 불리우는 저자를 인지한 건 좀 됐는데 그에 비하면 책을 읽은 건 많이 늦은 편이다. 각설하고. 정희진의 첫 책으로 『혼자서 본 영화』를 고른 건 '영화 에세이'이니만큼 저자와 첫만남으로 무난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인데 아무래도 망픽인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정희진의 작법에 관해 느낀 인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양극단 예를 일반화하여 포스터 혹은 대자보식 선동적 글쓰기

좌표 찍기와 체리피커식 사례 제시로 잦은 일반화 오류

현학적인 태도의 종점은 곡학아세

 

책 전반에 걸쳐 정희진은 이분법적 구조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는데 말하자면 '조건화 되지 않은 일반화에 의한 오류'와 '거짓 원인의 오류'로 층층이 우물을 쌓고 독을 푼다. (참고_ 맥스 슐만  「사랑은 오류」'Love is a Fallacy')

 

미카엘 하케네의 2002년 개봉작 <피아니스트>는 54회 칸에서 그랑프리, 남우주연,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원작소설은 200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로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여담이지만 이 영화에서 이자벨 위페르는 말이 필요 없는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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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본 영화』에 수록된 스물여덟 편 영화 중 <피아니스트>에서 페이지가 유독 안 넘어갔던 이유는 내가 본 영화와 정희진이 본 영화가 너무 달라서다. 정희진은 <피아니스트>에 '마조히즘을 욕망하는 여자?'라는 부제를 달았는데 나라면 '사드마조히즘을 욕망하는 여자'로 했을 거다. 그러니까 굳이 이런 부제를 써야 한다면 말이다.

 

정희진은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마조히즘을 욕망하는 여자? 피아니스트」 정희진『혼자서 본 영화』

 

그러나 대부분의 이성애자 여자들에게 남자의 벗은 몸은 공포요, 폭력이다. 성기 노출이 성폭력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여성이 그것을 얼마나 두려워하고 불쾌해하는지 그들이 정확히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이성애자이면서도 남자의 벗은 몸이 아니라 (남성의 시선으로)여자의 벗은 몸을 보면서 성욕을 느낀다. 우리는 남자의 안경을 너무 오래 쓴 탓에 남자의 눈을 가지게 되었다. (p.054)


남자의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쾌락이요 전복이지만, 여자의 그것은 변태 성욕이다. 여성이 마조히즘의 대상이 될 때는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지만, 이 영화에서처럼 여성 스스로 마조히즘을 욕망으로 선택하는 주체가 될 때는 처벌받는다. 다시 말해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에게 마조히즘이 있다고 강요하지만, 여성이 마조히즘을 선택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p.059)

 

 

사회운동을 하는 활동가라면 동시성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운동이 유기적으로 진화하려면 함께 가는 연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무슨 이유인지, 특히, 젠더 운동가들은 이 부분을 종종 간과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 그렇게 해야만 하는 내부 사정이 있는 건지 철지난 꽃노래만 자꾸 부르니 시의성이 사라지고 공감을 끌어내는 데 실패하는 것이다. 

 

발췌문은 전형적인 일반화 오류로 야동이 더이상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게 된 시대 정서를 고려하지 않은 주장이다. 지금은 성별을 떠나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숨기지 않는 시대이며 광장에서 몸과 성욕과 섹스를 떠드는 시대다. 시대가 변했으니 성 담론도 바뀌어야 된다는 얘기. 그런 점에서 '이성애자 여자가 남성의 시선으로 다른 여성의 벗은 몸을 보며 성욕을 느낀다'는 정희진의 주장 혹은 의견이 확증편향 혐의를 벗으려면 이런 결론에 다다른 과정에 대한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시각적 자극이 성욕에 미치는 영향 어쩌고 하는 뇌과학은 다들 아는 얘기일 테니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여자의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변태 성욕'이라고 규정 짓는 것도 마찬가지. 저자 본인의 주장인지 따로 출처가 있는지 궁금한 대목인데,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에리카의 불행은 에리카가 이상성욕자여서가 아니라 상대를 잘못 고른 데 있다. 역지사지 해보자. 호감을 주고받던 남녀가 호텔에 갔는데 방에 들어서자마자 남자가 자신은 가학 성향이라 여자를 묶어놓고 때리면서 강간하고 싶다고 한다. 혹은 피학 성향자인 남자가 여자에게 자신을 묶고 입에 양말을 물리고 옷을 찢고 강간해달라고 한다. 이 상황에서 남성의 요구를 거부하면 여성은 가해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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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면서 이 영화를 두 번이나 봤다는 정희진은 월터 클레머에게 분노한다.

 

마조히즘을 욕망하는 여자? 피아니스트」 정희진『혼자서 본 영화』

 

남자주인공이 여주인공에게 "당신은 미쳤어." "남자의 마음을 흔들어놓고 무시하면 어떡해?" "사랑은 함께 하는 거야. 같이 즐기는 거야." "내 손이 더러워질까 봐 못 때린다." "다시는 남자를 모욕하지 마."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웃음과 비웃음을 모두 참기 힘들었다. 그 남자에게 묻고 싶다. 그러면 '같이 즐기는' 그 각본은 누가 짜는데? 네가 한 강간이 같이 즐기는 거야? 네 손은 일상적인 폭력으로 더러워져 있잖아? 만일 그녀가 미쳤다면 그것은 그녀가 단지 중년 여자이기 때문이고, 네가 미치지 않았다고 간주되는 것은 단지 젊은 남자이기 때문이야. 만일 그녀가 변태라면, 넌 (성폭행)범죄자야. 그녀의 '변태성'은 최소한 남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아. 하지만 넌 그녀를 대상으로, 물건으로 만들었잖아? 그리고, 미치고 안 미치고는 누가 결정하는데?

영화의 마지막 성폭력 장면은 남자주인공, 아니 남자 일반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욕망과 상상력의 종착지가 결국은 삽입(강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남성 주체는 삽입 섹스를 함으로써 존재한다."는 안드레아 드워킨의 통찰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pp.59-60)

 

 

안드레아 드워킨이 얼마나 빼어난 인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젠더가 생계수단이라는 저자가 인용할만한 문장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문득 진모 씨의 남근다발 어쩌고가 떠오르네.

 

정희진이 체리피킹한 클레머의 폭언은 연인 간 보통의 섹스를 기대했던 클레머에게 에리카가 일방적으로 자신의 피학성향을 고백하고 기구들을 보여주며 편지에 목록으로 정리한 방식으로 자신을 학대하라고 부추긴 이후에 등장한다.

정희진이 성폭행 강간범이라고 분노의 플래그를 꽂은 월터 클레머는 그녀를 학대하고 물건(악기)처럼 다루어주길 원하는 에리카의 편지를 읽고 에리카에게 말한다. 당신이 내게 원하는 방식은 당신을 다치게 할 것이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치료이며,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과 섹스를 하고 싶다.  

 

소설은 에리카의 편지를 읽는 클레머의 심리를 보다 성실하게 서술하고 있다.


『피아노를 치는 여자』 엘프리데 옐리네크ㅣ문학동네

 

그가 큰 소리를 내어 편지를 읽는 건 단지 자신을 신명나게 하기 위해서다. 그녀가 원하는 걸 참아내려 했다가는 누구든 조만간에 저 세상 사람이 될 것이다. 이것은 고통의 종류를 열거한 목록일 뿐이다. "이대로 하자면 나는 당신을 완전히 물건처럼 다뤄야 해." (p.286)


"그건 우리의 관계에서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야, 에리카." 클레머는 자기의 어떤 부탁도 들어줘서는 안 된다는 에리카의 당부를 읽으면서, 도저히 그 내용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p.287)


"그럼, 그렇게 해서 나한테 돌아오는 대가는 뭐지?" 클레머가 농담처럼 말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이란 그에게 아무런 재미도 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묻는 것이다. (p.288)


클레머는 편지를 보고, 그가 그녀를 꿀꺽 삼켜주기를 여자가 원한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밥맛이 떨어져 그걸 정중하게 거부한다. 클레머는 '사람들이 네게 하지 않길 바라는 일은 너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는 격언으로, 자신이 거절하는 이유를 댄다. 그리고 그 역시 재갈을 물고 사슬을 몸에 감기는 싫다고 말한다. "나는 당신을 너무나 사랑해서 절대로 당신에게 고통을 줄 수는 없어. 절대로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줄 수가 없다구." 클레머는 그렇게 말한다. "누구나 결국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지." 결코 편지에서 읽은 대로 따르지 않을 거라는 건, 그에게는 이미 확고하게 결정돼 있는 일이다. (p.291)

 

 

정희진이 의도적으로 생략했는지 혹은 중요하지 않다고 무시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전후 맥락을 생략한 정희진의 글만 보면 클레머가 갑자기 휙 나타나서 에리카를 강간하고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편지와 강간 사이에는 중간 과정이 있다. 정희진이 언급하지 않은 중간 과정은 이렇다. 에리카의 편지(피학 리스트)를 읽은 클레머는 에리카가 원하는 사드마조히즘 섹스를 거부하고 아파트를 떠난다. 이튿날 에리카는 클레머를 찾아가 (묶지도 때리지도 않는 정상적인)구강성교를 시도하지만 행위 도중에 에리카가 구토를 하고 그 모습에 클레머는 모욕을 느낀다. 그리고 그날밤 에리카의 아파트에 들이닥친 클레머가 네가 원하는 섹스를 하겠다고 덤비는데 이어지는 장면이 정희진이 분노한 문제의 성폭행, 정확히는 동의를 강요한 비동의 강간이다. 행위 중에 클레머가 반복해서 하는 말은 '이런 걸 원하지 않았냐'였다.

 

문제의 장면에서 정희진의 주장처럼 클레머가 여성 성기에 삽입을 함으로써 강간 판타지를 이루었다고 느꼈다면, 단언하건데 정희진은 보고 싶은 것만 본 것이다. 이 장면은 에리카와 클레머 둘 모두에게 불행한 장면으로 에리카는 자신이 원했음에도 막상 피학에 놓이자 이상과 다른 현실에 절망하고, 클레머는 단호하게 거부했던 에리카의 리스트를 실행한 자신과 그녀를 조롱한다. 정서적 오르가즘이 배제된 사정은 여성에게나 남성에게나 배설의 충격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포르노 동영상이 에리카에게 가르쳐주지 않은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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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에리카와 클레머의 호흡과 표정, 움직임으로 폭력 혹은 폭행의 시작과 끝을 거칠게 보여주는데 같은 장면을 소설은 다소 차분하고 냉소적으로 서술한다. 소설이어서 가능한 서술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행위보다 더 격렬한 클레머의 자의식인데 자기긍정, 자기부정, 자가당착이 엎치락뒤치락 하는 클레머의 자아는 일견 블랙코미디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설은 클레머가 에리카의 아파트에 들이닥치는 장면부터 아파트를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에 이르는 동안 이기적이고 속물적이고 자기모순적인 당위로 이어지는 클레머의 심리 변화를 강박적으로 묘사한다. 

 

정희진은 <피아니스트>를 마조히스트 에리카와 강간범 클레머로 단순 분류하지만 발췌에서도 볼 수 있듯 클레머의 서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무엇보다 정희진은 언급하지 않지만 에리카에게 클레머만큼 혹은 클레머보다 더 중요한 인물은 에리카의 엄마다. 페미니스트에게 '여적여'가 금기어에 가깝다는 건 이해하지만 이 영화는 에리카 모녀를 빼고 얘기해서는 안 된다. 애초에 에리카의 이상성욕과 편집증의 기저에 정상적이지 않은 모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일찍 사망한 아버지 대신 남편 역할을 하며 엄마와 기형적인 애착관계를 형성하며 성장한 에리카는 서른 중반이 되도록 엄마와 심리적으로 감금, 종속된 관계다. 다양한 관계과 역할을 통해 자연스럽게 사회화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엄마의 시선에 갇혀 거울 속 자아만 보며 성장한 에리카의 이상성욕은 타인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는데 그 정점이 월터 클레머다. 영화에선 드러나지 않지만 소설에선 에리카가 지긋지긋한 엄마 대신 클레머가 이상적인 엄마의 역할을 해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심리를 읽을 수있다.

 

정희진은 에리카를 마조히스트로 규정하는데 그런 규정만으로는 에리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에리카는 엄마와 클레머에겐 사디/마조히스트, 피아노 교습생들에겐 사디스트 성향을 보이는데 이런 차이는 에리카가 엄마와 클레머에겐 자신의 바닥을 보이는 걸 허용했기 때문이다.

 

책을 읽은 전체적인 감상은 정희진은 괜찮은 영화 평론가는 될 수 없겠다는 거다. 

 

 

덧1. 정희진은 '가부장제'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데 정희진이 쓰는 전통적 방식의 가부장제와 2000년 이후 그러니까 딸바보 등장 이후의 가부장제는 의미가 달라졌다. 생계노동은 남성, 가사노동은 여성으로 부부 역할을 고착화했던 기존의 질서는 이미 오래전에 깨어졌다.

 

덧2. 정희진은 '특정 지역, 특정 시기, 특정한 성의 경험일 뿐'(p.063)이라고 마르크스 주의를 지엽적인 것으로 간주했지만 실상 변증법의 핵심인 '낡은 것에 대한 비판을 통해 기존 세계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말로 사회운동가들의 지향점이지 않던가? 

 

덧3.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규정하는 옐리네크는 과격한 페미니스트들로부터 반페미니스트로 배척받았다고 한다.

 

덧4. '에리카'를 이해하끼 위해 필요한 것은 공감이 아니라 진단과 분석이다. 페미니즘 뿐 아니라 병리학적 고민도 같이 해야 된다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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