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 Caf´eㅣ신유진 > Review

본문 바로가기
Login
NancHolic.com 감나무가 있는 집 Alice's Casket 비밀의 화원 방명록
Review
-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7647 bytes / 조회: 169 / 2023.10.26 23:48
[북마크] Mon Caf´eㅣ신유진


20231026232358_a969d6fd7bc35dd32b14cf5672c8f68f_ox7i.jpg

 

몽 카페 파리에서 마주친 기록 

신유진ㅣ시간의흐름

 

 

아메리카노는 커피가 아니라 칵테일의 이름이다.

파리의 카페에서 메뉴판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알코올류에서 '아메리카노' 칵테일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처음 만들어졌지만, 이탈리아 바닷가에 정착하기 시작한 미국인들이 이 술을 즐겨 찾으면서 '아메리카노'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캄파리를 베이스로 만든 롱칵테일, 그러니까 아메리카노는 이름과 달리 이탈리아의 해변을 담고 있다.

캄파리와 이탈리아의 해변이라 하면 역시 마르그리트 뒤라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뒤라스의 소설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속 주인공들은 이탈리아의 어느 섬에서 캄파리를 마시며 권태로운 나날들을 보낸다. 그 소설은 뒤라스의 초기 작품이지만, 뒤라스 월드의 공식이 그대로 담겨 있다. 즉 더위와 술과 권태다. 내게 뜻밖의 아메리카노가 찾아왔던 날도 더위와 술과 권태가 있었다. 그러니 매우 뒤라스적인 날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날 나는 새로운 아메리카노가 열어주는 세상을 알게 됐다 아침부터 노을을 떠다 담근 듯한 붉은 술을 마시면 이탈리아 해변의 46도 무더위가 온몸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에 나는 이미 하루 끝에 걸터앉아 그네를 탔다. 천천히 나아가면 감질나고, 힘차게 발을 구르면 위태롭고.

-p.29

 

생제르맹 데프레, 어느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지나가는 노부부를 봤다.

그들은 손을 꼭 잡고 생 미셸 대로를 걷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나의 병아리"라고 불렀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나의 오리"라고 불렀다.

병아리와 오리가 나란히 함께 걸어갔다.

-p.37


마레, 어느 카페에서

 

한국 남자를 만났다. 그는 비지니스 통역사를 찾고 있었고, 그러니까 나는 면접을 보는 중이었다.

업무에 관해 설명하던 중 그가 뜬금없이 물었다.

"여기가 게이 동네지요?"

"게이 클럽, 바, 카페가 많죠."

"여기 괜히 무섭네."

"왜죠?"

"아, 난 여자 좋아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래서요?"

"징그럽잖아요."

한심한 놈. 나는 네가 징그러운데.

이래서 먹고 사는 일이 어렵다.

-p.56


어제는 그가 굶고 오늘은 내가 굶는다. 내일은 둘 다 굶어야 할 판이다. 끼니를 때우는 것은 생활의 영역이고 먹어봐야 입만 즐거운 커피와 크루아상은 판타지의 영역이다. 연애는 판타지에서 생활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여정이고, 나는 지금 스텝 1, 판타지의 영역에 있다. 그러니 배가 고프지 않다. 꼬르륵 소리는 빵과 커피가 소화되는 소리다.

스탕달은 이것을 '결정작용'이라 불렀다. 잘츠부르크의 소금 광산 깊은 곳에 잎이 떨어진 나뭇가지를 던져놓고 한참 후에 꺼내보면 그 나뭇가지가 온통 소금 결정체로 뒤덮여서 반짝이는데, 소금 결정이 평범한 나뭇가지를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게 하는 것, 그것이 결정작용이며, 사랑이란 바로 이런 결정작용이라고 말했다. 내 인생의 마른 나뭇가지들이 소금 결정체로 빛나는 중인데 밥 좀 굶으면 어떠하리.

-p.68


언젠가 애인을 데리고 스타벅스에 간 적이 있다.

그때까지 단 한 번도 프랜차이즈 카페를 경험해 본 적 없었던 그 프랑스 촌놈은 일단 주문대 앞에서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날 스타벅스 직원과 애인의 대화는 다음과 같았다.

"이름이 뭐죠?"

"네?"

"이름을 말씀해주세요."

"왜죠?"

"컵에 손님의 이름을 쓰거든요. 커피가 나오면 이름을 불러드릴게요."

"컵에요?"

"네."

"물에 지워지는 매직으로요?"

"네? 아, 일회용 컵이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애인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내게 조용히 속삭였다.

"그러니까 대형 자판기네."

어쨌든 우리는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빈자리를 찾아 한참을 돌다가, 가방부터 던지는 스킬을 발휘하여 카페 한복판에 있는 테이블에 겨우 앉을 수 있었다. 외국인들 그리고 이 새로운 커피 문화에 이미 익숙해진 프랑스인들이 노트북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뭔가를 하고 있었고, 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쟁반을 들고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카페를 한참 둘러보던 애인이 살짝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

"네 취향이 도서관인 줄은 몰랐어."

연극배우인 그의 우렁찬 목소리가 옆자리에 앉은 남자의 문서 작업을 방해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그는 의자와 의자 사이가 너무 멀다는 핑계를 댔다.

"이거 봐, 팔이 안 닿잖아. 이렇게 멀리 있는데 어떻게 소곤소곤 말해!"

아, 그의 손이 내 몸에 닿지 않는다. 파리의 카페에서 이토록 멀리 떨어져 앉을 수 있다니.

-pp.133-134

 


 

 

 

 

 

 

 

 

* 댓글을 읽거나 작성을 하려면 로그인을 해야 합니다.

Total 339건 1 페이지
Review 목록
번호 분류 제목 날짜
339 도서 숲속의 늙은 아이들 24.04.21
338 영상 페어플레이(2023) 24.03.10
337 도서 지구에 마지막으로 남은 시체ㅣ레이 브래드버리 24.03.06
336 도서 갈대 속의 영원ㅣ이레네 바예호 24.02.14
335 도서 문학이 필요한 시간ㅣ정여울 24.02.13
334 도서 서머ㅣ조강은 4 24.02.10
333 도서 조국의 시간ㅣ조국 24.01.21
332 도서 리어 왕ㅣ셰익스피어 23.12.28
331 도서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ㅣ비비언 고닉 23.12.21
330 북마크 LineageㅣTed Hughes 23.12.12
329 도서 또 못 버린 물건들ㅣ은희경 23.12.05
328 도서 저주토끼ㅣ정보라 23.12.02
327 도서 인생연구ㅣ정지돈 23.11.06
326 도서 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라고ㅣ신유진 23.10.29
325 도서 몽 카페ㅣ신유진 23.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