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연구ㅣ정지돈 > Review

본문 바로가기
Login
NancHolic.com 감나무가 있는 집 Alice's Casket 비밀의 화원 방명록
Review
-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8619 bytes / 조회: 223 / 2023.11.06 06:42
[도서] 인생연구ㅣ정지돈


20231106061713_a969d6fd7bc35dd32b14cf5672c8f68f_ui53.jpg

 

인생연구ㅣ정지돈

 

 

책을 펼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새끼가 또' 했다. 문제의 대목은 '대리는 지금은 얌전히 대기업 홍보팀에서 일하지만 한때 장정일 밑에서 시를 배웠나 소설을 배웠나 했던 사람이다'(p.15)인데, '실제 사건, 인물과 관련 없으며 우연의 일치'라는 한 줄을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고 소설에 실명을 배치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적당히 좀 해라 싶다. 

 

인용에 등장하는 '대리'는 친구의 여친이자 나와는 썸인듯 썸 아니었던 여사친 안젤라의 n번째 연인이었던 유부녀인데, 문제는 이 유부녀가 장정일 문하생이었다는 내용이 소설 맥락과 아무 상관 없이 갑툭튀했다는 거다. 이성복에 이어 이번엔 장정일인가. 저자의 해명처럼 당사자와 관련 없고 그저 우연의 일치면 그 이름을 안 쓰면 그만이지 굳이 이성복이고 장정일일 때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닌가. 아님 그 이유조차 우연이라고 할 셈인가.

 

책 후면 '작가의 말'에 등장하는 'AI', '알고리즘'과 관련하여, 정지돈에게 해당 표현을 한 비평가의 의도는 알 수 없지만 정지돈의 소설을 꾸준히 읽은 바로 한 마디 하자면 정지돈의 머리 속에는 이미 본인만의 알고리즘에 의한 작법 공식이 종결되었으며 정지돈은 그 종결된 알고리즘을 벗어나는 글은 못 쓰는구나 혹은 못 쓰겠구나, 라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보태자면 이른바 저널리즘식 글쓰기의 대가인 카레르를 전범 삼아 카레르의 형식 뒤에 숨은 '소심한 작법 정의'가 좀 비겁하달지. 

 

어쩌다 보니 정지돈의 첫 단편집과 최신간 단편집을 연이어 읽었는데, 앞서 첫 단편집을 읽고 정지돈에게 사드/마조히즘 소재의 로맨스소설을 추천했던 건 너무 나이브했다는 깨달음이 있었다. 

 

정지돈의 소설 몇 권을 읽으면서 종종 느끼던 기시감의 정체를 이번 신간을 읽으면서 보다 분명하게 확신했는데 작가가 진짜 욕망을 숨기고 직조한 텍스트 위를 발 없이 배회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건 우연이 아니구나 라는 것이다. 그러니 '후장사실주의자'라는 장난 같은 농담 같은 정지돈의 선언은 아마도 그의 진짜 욕망이지 않을까 싶은 거다. 어쩌면 작가의 진짜 욕망 심해에 도사리고 있는 건 시체와 신체절단과 항문을 포함한 인간 신체의 모든 구멍을 절단내는 료나물이 아닐까.

 

왜 갑툭 료나물인가 설명을 보태자면 일단 소설을 읽다 '똥' 융단 폭격을 맞은 게 가장 컸음을 미리 밝혀둔다. 사실 정지돈은 다른 작가에 비해 항문(외에 게이 섹스 등 관련된 것들)에 대한 언급을 꽤 자주 하는 편이다. 이번 신간의 경우, '「엉덩이」는 레즈비언 매춘부 봉기 페레즈의 이야기다'(pp.98-99)로 시작하는 문단처럼 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쓰면 저 양반은 저런 주제에 관심이 있나 보다 생각하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그리고 「B!D!W!F!」(걸레!레즈비언!게이새끼!창녀!)에 이르면 '내 진짜 욕망이 저기에 있다'고 알아주길 바라는 작가의 숨죽인 외침이 들리는 것 같은 '해석 너머'(오해 없으시길)가 막 밀려든달지. 

 

문학을 읽을 때 얼어붙은 호수를 깨는 건 독자의 몫만은 아닐 거다. 작가도 글을 쓸 때 자기 안의 얼어붙은 호수를 깨는 무모한 과단성이 필요한데 이게 생각처럼 쉽지 않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품위있고 고상하고 우아한 사람이고 싶어하는 유치한 종(種)이므로.

 

 

20231126033725_476a06b109b94fb25abf37cbe0b2b81d_gtu3.jpg

 

 

'작가의 말'에서 정지돈은 본인의 작법, chat GPT협업 등을 얘기하면서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 적인 것(AI)을 구분하는 것에 대해 토로하는데, 이건 내가 대답해줄 수 있다. 인간과 AI의 가장 큰 차이는 'I am'을 이해하느냐, 'I'만 이해하느냐에 있다.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는 시퀀스 거의 전체가 '레플리컨트를 구분하는 것'으로 이어지는데 구분하는 방식은 '질문'이다. 그리고 질문 내용의 기저는 'I am'을 구성하는 것들로 가득하다. 예로 어린 시절 기억을 묻는 장면에서 '피아노를 친 것'은 'I', '피아노를 치면서 즐거웠던 것'은 'am'이다.

 

수록 단편 8편 중 드디어 줄거리를 요약할 수 있는 소설이 등장한다. '베티 블루'와 '해저생활'인데 아쉬운 점은 단편의 생리를 감안해도 결말부를 툭 날리는 바람에 완결성이 강제로 '순장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됐다고? 물어봤자 의문은 공허한 메아리가 될 뿐...

 

마지막 수록작 「끝없이 두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는 chat GPT와 협업했다는데 솔직히 바로 앞에 수록된 「자가 수술을 위한 구부러진 공간에서」도 AI 협업이 아닐까 의심했다. 특히 고주망태의 잠꼬대 같았던 217p '그 시절이 어땠는지는'로 시작하는 문단은 기계가 썼나 했다.  

 

사실 「자가 수술을 위한-」을 읽을 때부터 내가 정지돈의 소설을 진지하게 읽을 이유가 있을까 고민이 시작되었다. 인터넷 검색과 위키가 없으면 소설을 쓰지 못할 것 같은 정지돈의 소설을 더 읽을 이유가 있을까 라는 생각도. 

 

 

미국의 시인 로버트 로웰은 이렇게 말했다. "서른한살, 아무것도 안 함." 나라면 이렇게 쓸 것이다. 서른한살, 아무 것도 안 됨. 김애란은 「서른 살」에서 이렇게 썼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하지만 나는 나도 되지 않았다. 서른한살의 나는 스스로를 되다 만 무엇이라고 생각했다." (pp.18-19)
 

 

가만 보면 '서른 살'이 많은 사람에게 상징적인 숫자인 것 같다. 시인도 작가도 독자도 종종 '서른 살'에 깃발을 꽂는 걸 보면 말이다.

최승자 시인은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고 했으며 최영미 시인은 '서른, 잔치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고 '스무 살'을 얘기한 김연수도 있다. 

결국 서른 살은 스무 살의 그늘이 아니겠는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잡솔_

작가와 소설에 관하여, 뭔가 쓸 말이 많았는데 롤월즈에서 lpl 1-4시드 도장깨기를 하는 T1을 응원하는 동안 망각의 강을 건너고 말았다.

다만 정지돈의 소설은 이제 그만 읽어도 되겠다- 했던 기억은 생생하다. 책장에 아직 안 읽은 그의 신간이 두 권이나 꽂혀 있는 건 생각하지 말기로...

* 댓글을 읽거나 작성을 하려면 로그인을 해야 합니다.

Total 339건 1 페이지
Review 목록
번호 분류 제목 날짜
339 도서 숲속의 늙은 아이들 24.04.21
338 영상 페어플레이(2023) 24.03.10
337 도서 지구에 마지막으로 남은 시체ㅣ레이 브래드버리 24.03.06
336 도서 갈대 속의 영원ㅣ이레네 바예호 24.02.14
335 도서 문학이 필요한 시간ㅣ정여울 24.02.13
334 도서 서머ㅣ조강은 4 24.02.10
333 도서 조국의 시간ㅣ조국 24.01.21
332 도서 리어 왕ㅣ셰익스피어 23.12.28
331 도서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ㅣ비비언 고닉 23.12.21
330 북마크 LineageㅣTed Hughes 23.12.12
329 도서 또 못 버린 물건들ㅣ은희경 23.12.05
328 도서 저주토끼ㅣ정보라 23.12.02
도서 인생연구ㅣ정지돈 23.11.06
326 도서 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라고ㅣ신유진 23.10.29
325 도서 몽 카페ㅣ신유진 23.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