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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9933 bytes / 조회: 229 / 2023.12.02 19:50
[도서] 저주토끼ㅣ정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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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토끼정보라 

 

 

원래 대출했던 책은 초판본인데 책을 읽던 도중 개정판이 단순히 출판사만 바뀐 것이 아니라 본문 수정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읽던 책을 반납하고 당시 대출중이던 개정판이 반납되길 기다렸다가 다시 대출했다.


2022년 한국 소설장에서 최고의 화제작 중 하나였던 소설가 정보라의 호러/SF/판타지 소설집 《저주토끼》가 래빗홀에서 전면 개정판을 선보인다. ‘만두 파동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쓰인 표제작 〈저주토끼〉는 날카로운 분노를 생생하게 살리고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사람들의 맥락이 선명히 드러나기를 바라는 작가의 뜻을 충실히 반영하여 결말 부분 일부를 최초 창작 버전으로 복원하였다. 또한 수록작 전반에 걸쳐 외국어 표기, 인물 간 대사와 말투, 그리고 일부 혼재되었던 명칭이나 부정확한 표현 등을 수정 보완했다.

 

-출판사 책소개

 

 

논문인들 안 그렇겠냐만은 '첫 문장'은 의심할 여지 없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저주토끼』는 첫 문장부터 산만한 독자의 주의를 성공적으로 사로잡는다.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 할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두 열 편의 단편이 수록되었는데 단편집을 읽은 전반적인 감상은 '성인용 잔혹동화'. 수록 단편 중 우화인 「덫」이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다른 단편도 그렇지만 「덫」을 읽으면서 작가가 정말이지 거침없이 쓰는구나 느꼈다. 

 

수록 단편 모두 잔혹동화의 구성점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는 한편 각 단편마다 조금씩 다른 감상을 느낄 수 있는 건 이 소설집의 가장 큰 장점이다. 「덫」이 서늘하고 치명적인 우화라면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는 아시모프 류의 환상소설을 읽은 기분이고, 「몸하다」는 카프카 식 불안, 「즐거운 나의 집」은 여성계가 환영할 만한 레토릭이 눈에 띄는 것처럼. 한마디로 잘 차린 뷔페를 맛본 포만감을 느꼈다.

 

이 소설집에 국한하여(작가의 다른 책은 아직 읽지 못함) 작가의 서술 트릭이 눈에 띄는데 「즐거운 나의 집」은 이런 특징이 특히 두드러진다.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마지막 문장을 읽자마자 앞으로 되돌아가 다시 읽었는데 '속았구나' 깨달았을 때 유쾌했던 이유는 그만큼 작가가 서술트릭을 자연스럽고 능란하게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지막 단편 「재회」에 이르면 더는 속는 즐거움은 없지만 대신 아는 것이 보이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소설 자체로 불편한 점도 있다. 독자를 따돌리는 엔딩으로 서술이 진행되는 동안 마주치는 듬성듬성 비워진 구멍이 결국 메꿔지지 않고 끝나버리는 것이다. '해석은 독자의 영역'으로 이해하기에는 지나치게 불친절한 서술과 '결'이다 보니 독자로선 뭘 먹기는 먹었는데 뭘 삼켰는지 모르는 찜찜함이 남는다. 작가도 이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고 또 후기에도 의도적이라고 밝혔으니 앞으로도 이 장르- 호러, 환상, SF에 관한한 태도를 바꿀 것 같지는 않다, 작가 후기에 의하면 그것이 작가가 이해하는 '장르'의 속성이라고 하니까. 물론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만 이것도 작가의 고유 영역이므로 존중한다.

참고로 수록 단편 모두 그렇다는 건 아니다.

 

'결말'과 관련하여 첨언하자면, 직전에 읽었던 다른 소설들도 그렇고 최근 작가들의 단편 소설에 이런 경향이 두드러져 보이는데 '열린 결말'에 대해 작가의 사전적 정의는 독자의 그것과 다른가 싶다. 열린 결말이란 결을 맺지 않고 끝내는 게 아니라 결을 맺되 여러 해석의 길을 열어두는 것이다. 두 방식의 차이는 따로 논할 것 없이 뚜렷해서 전자는 찜찜함, 후자는 여운을 남긴다. 일단 완성한 음식을 내놔야지 먹어보고 이렇다 저렇다 평을 하지 식재료에 밑간만 한 것을 음식이라고 내놓은들 맛은커녕 제대로 소화는 되겠는가. 어떤 작가들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지만.

 

이외에도 불친절한 서술이 아쉽다. 「차가운 손가락」이 대표적인데 다른 리뷰를 검색해보고 나만 모르는 게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위안을 받았던 웃픈 현실...

 

이 소설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사필귀정', '인과응보'다. 죄를 지은 놈은, 비록 동기가 선의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결국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른다는 결말이 마음에 들었다. 언제부턴가 드라마 등을 통해 우리 사회가 악인에게 변명을 허용하고 악인을 포용할 것을 은근히 강요하는 풍토가 조성되어왔는데, 이를 확대 해석하면 결국 친일파의 친일 행각도 갑론을박의 토대를 줄 수 있으므로 평소 굉장히 문제 있는 풍토라고 생각하던 바, 나쁜 놈은 나쁜 놈이고 나쁜 짓은 나쁜 짓이라는 당연하고 상식적인 정의가 매우 반가웠다.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를 거친 분단국가의 시민인 우리가 명심해야 할 건 이해와 용서는 별개라는 거다.

 

거침없는 서술은 차가운 듯 보이는데 결말은 인과응보라 인간 혹은 존재에 대한 예의가 느껴지는, 비유하자면 차가운핫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기분이 드는 소설집이었다. 단편이 만족스러우니 작가의 장편도 궁금하다.


토끼의 붉은 눈이 좀 불량하지만 와중에 귀여움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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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 있습니다! 


「차가운 손가락」에 덧붙여...


 

「차가운 손가락」은 이 선생, 김 선생, 최 선생이 등장한다.

이 선생은 자신을 김 선생이라고 지칭하는 목소리에 의지해 사고 차량에서 빠져나와 김 선생과 어디론가를 향해 걷기 시작한다. 그리고 장막에 쌓인 것처럼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곳을 헤매며 김 선생과 대화를 나누는데 사고 경위를 묻는 이 선생의 질문에 김 선생의 대답이 매번 바뀐다. 

 

-결혼한 최 선생 신혼집 집들이에 다녀오던 길이다

-남편의 불륜으로 이혼한 최 선생을 위로하고 오는 길이다

-짝사랑하던 남자가 결혼하자 실의에 빠져 목숨을 끊은 최 선생의 장례식에 다녀오는 길이다


이 선생은 말을 자꾸 바꾸는 김 선생의 태도에 불길함을 느끼고 걸어왔던 방향으로 뒤돌아 혼자 뛰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두운 밤 도로에서 사고 차량을 보는데 운전석에 앉은 사람은 자신이다.

 

그러니까 내가 궁금한 건 목소리의 정체인 '김 선생'이다. 목소리가 '최 선생'이면 궁금할 게 1도 없는데 김 선생이라니까 궁금한 거다. 김 선생이 왜애애??? 김 선생은 도대체 누구야???

 

「차가운 손가락」은 어려운 내용도 아니고 헷갈릴 요소도 없음에도 오리무중인 핑퐁 대사가 안개 너머로 보는 풍경처럼 불분명해서 반복해서 읽었던 단편이다. 실제로 최 선생이 신혼인 유부녀인 줄 알았는데 다시 읽으니 맥락 상 이 선생의 남편을 짝사랑했던 미혼인 걸 알고 혼자 뻘쭘했다.

 

최 선생이 유부녀가 아니라 미혼임을 구분하고 나니 헷갈렸던 맥락이 비로소 잡힌다. 아무 것도 모르고 사고를 당한 이 선생은 피해자고, (김 선생에 의하면) 이 선생의 남편에게 단물만 빨리고 버려진 최 선생도 피해자고. 그래, 알겠는데.

그래서 김 선생은 누구냐고- 핸들을 꺾은 건 최 선생 귀신인 거냐고오-

 

밥상을 차려만 줄 게 아니라 밥을 입에 떠먹여 줘야 만족하는 나 같은 스포성애 독자는 이럴 때면 그냥 우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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