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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18978 bytes / 조회: 129 / 2023.12.28 16:01
[도서] 리어 왕ㅣ셰익스피어


::익히 다 알려진 내용이라 따로 스포 표시는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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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셰익스피어 극 세계를 대표하는 한 단어를 꼽자면 '막장'이다. 여기에 사감으로 수사를 붙이면 '고급진 막장', 그중에서도 막장 오브 막장의 대향연이 『리어 왕』이다.

 

2.

『리어 왕』의 줄거리를 견인하는 축은 크게 두 개이며 매우 심플하다. 

여기 두 노부가 있다. 한 노부는 딸 셋을 가진 홀아비이며, 다른 노부는 아들 둘을 가진 홀아비이다. 두 노부는 믿었던 자식에게 배신당하고 광야로 쫓겨난다. 가산과 가신을 뺏기고 맨 몸으로 쫓겨난 딸 셋의 노부는 광인이 되고, 두 눈을 잃고 혈혈단신 쫓겨난 아들 둘의 노부는 광야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한다. 

 

딸 셋의 노부는 리어 왕, 아들 둘의 노부는 글로스터 백작이다.

 

3.

『리어 왕』은 등장인물들 각자가 가진 정의와 악의의 대비가 의심할 바 없이 선명하며 각자의 정의와 악의는 각자의 운명을 '사필귀정', '인과응보'로 이끈다. 

사실 희곡을 읽으면서 이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는데 셰익스피어가 매우 엄혹하고 차가운 셈법을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공정한 셈법'이 아니라 '차가운 셈법'이라고 한 이유는 셰익스피어식 응징 엔딩이 이를테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를 바늘 끝처럼 한 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저울 눈금 위에 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베니스 상인』의 재판 장면에서 샤일록과 안토니오의 희비극을 갈랐던 '1파운드 살'이 단순히 소재가 아니라 셰익스피어식 '사필귀정', '인과응보'를 대변하는 레토릭의 핵심일 수도 있겠다고 느꼈던 대목.

 

3+α

리어 왕과 세 딸(고너릴, 리건, 코딜리어), 글로스터 백작과 두 아들(에드가, 에드먼드), 켄트 백작과 (고너릴의)시종 오스왈드, 콘월 공작과 올버니 공작은 모두 각자의 정의와 의지로 자기 운명의 엔딩을 준비하는데 선과 악의 결말이 흥미롭다. 단순계산으로는 선은 승리하고 악은 패배해야 하지만 문제는 등장인물 모두 선하기만 한 것도 악하기만 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정의와 선의로 한 행동이라도 상대에겐 불의와 악의가 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벌어진 결과의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코딜리어와 글로스터 백작인데, 코딜리어는 굳이 애정을 확인하고 싶은 아버지의 심경을 알면서도 끝까지 자기 결백을 고집하고(예.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하옵는데), 글로스터 백작은 자신의 출생에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 에드문드를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모욕한다. 두 사람 모두 악의는 없었으나 문제는 둘의 태도가 상대에겐 악의로 작용했다는 거다. 결국 나의 선의는 결백하며 그것이 정의라는 두 사람의 오만과 무지가 이 모든 막장과 파국의 단초가 된다.

 

리어 왕의 어긋난 선의도 마찬가지.

권력과 재산을 나눠주면서 그 김에 딸들의 애정도 확인하고 공치사도 좀 하고 싶었던 것 뿐인데 정작 가장 아끼고 믿었던 막내딸이 입바른 소리만 늘어놓으니 그만 마음이 상할대로 상한다. 여기서 리어의 치명적인 잘못은 코딜리어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코딜리어의 몫까지 다른 두 딸에게 줘버렸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리어 왕'의 비극은 나의 선의가 상대에겐 악의가 되는 역설이 빚어낸 파국이다. 한편 나의 선의와 너의 악의가 빚어낸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자들의 장송곡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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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전개를 보며 '파국이다 파국!' 가슴 졸이다 보면 한순간 인물들의 서사가 충돌하며 빚어낸 비극의 참상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이 막장의 비극은 산 자와 죽은 자로 정리된다. 살아남은 자는 당연히 나의 선의와 타인의 악의로부터 한 걸음 비켜간 자다.

 

5. 

셰익스피어 비극을 구성하는 핵심은 이분법적인 선악 대결 구도에 있다. 이 선명한 선악 구도가 등장인물들의 다층적인 서사와 맞물려 굴러가는 것인데, 즉 나쁜 놈도 할 말이 있다. 그리고 예의 셰익스피어의 차가운 셈법이 모든 인물들에게 '1파운드 살'의 저울을 들이댄다. 이후는? 예견된 파국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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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

너의 신분을 이토록 심히 착각하고, 너를 이곳에 묶어놓은 놈이 누구냐?

켄트

놈과 년입니다. 폐하의 사위와 딸입니다.

리어

아니야.

켄트

맞습니다.

리어

아니라고 했다.

켄트

맞다니까요?

리어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켄트

아니요, 그들이 그랬습니다.

리어

주피터에게 걸고 맹세하건대, 아니다.

켄트

주노에 맹세하건대, 맞습니다.

 

p.174 (펭귄)

 

이 장면은 슬프고도 심각한 상황에 펼쳐진 대화인데 이런 류의 인물 간 티키타카는 셰익스피어의 장기이기도 하다. 비극만큼이나 희극에도 일가견이 있는 셰익스피어의 유머가 반짝인다. 

을유 번역은 신사들의 대화답게 훨씬 점잖지만 을유가 판본으로 삼은 저본을 모르니 대사의 뉘앙스로 번역을 논하기는 어렵다. 

 

발췌 중 '놈과 년입니다. 폐하의 사위와 딸입니다'의 펭귄 원문은, 

'It is both he and she; Your son and daughter'. (p.661)

 

왕의 첫째 딸 고너릴 부부의 무도한 짓에 발끈한 켄트가 리어에게 역정을 내는 모습이 눈앞에서 보는 듯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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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급한 김에 을유와 펭귄의 번역을 보자.

역자의 개성에 따라 글의 맛이 다르니 기호에 맞는 번역을 골라 읽으면 되겠다.

 

오스왈드

저를 치시면 안됩니다.

켄트 

발도 걸면 안 되겠구나, 이 비천한 축구 선수 놈아!

(발을 걸어 넘어 뜨린다)

리어 

잘 했다. 나를 잘 섬겼으니 내 너를 아껴 주마


p.38 (을유)


오스왈드

저는 맞을 이유가 없습니다, 나리.

켄트

발에 걸려 넘어지고 싶지도 않겠지, 비열한 축구 선수 같은 놈아!(발을 걸어 그를 넘어뜨린다)

리어

고마운 녀석. 내 시중을 잘 드는데, 앞으로 내가 아껴주마.


p.134 (펭귄)

 

 

그러나 단순히 뉘앙스의 차이가 아니라 의미가 아예 다른 번역도 있다.

  

켄트

저의 주군이신 폐하께 영원한 작별 인사를 드리고자 왔습니다.

여기 안 계십니까? 

 

p.297 (펭귄) 


켄트

저는 제 주군이신 왕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여기 안 계신가요?

 

p.181 (을유)

 

(사족을 붙이자면) 펭귄 번역은 독자의 가슴을 철렁하게 한다. 내가 켄트 백작에게 정이 든 탓도 있지만 '영원한 작별 인사'이라니, 켄트가 리어를 떠나려고 하는가 보다고 누구나 오해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원문을 보면 단순한 밤 인사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해당 장면이 밤의 일인 건 원문 대사로 알았다.  

 

원문_

 

Kent

I am come.

To bid my King and master aye good night.

-p.776

 

 

을유 번역을 읽던 중의 일. 

에드가가 오도방정을 떠는 서슬에 켄트가 죽은 줄 알고 울컥해서 눈물까지 살짝 맺혔는데 페이지를 넘기니 켄트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 거다. 에드가 이 새끼...71.png


광야로 쫓겨나 방황할 때 광대가 리어를 부르는 '아저씨' 호칭이 궁금해서 원문을 확인해보니 해당 단어는 'nuncle'이다. 

: The meaning of NUNCLE is un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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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의 발단을 원문으로 보자.

 

LEAR (…)What can you say to draw A third more opulent than your sister? Speak!

CORDELIA Nothing, my lord.

LEAR Nothing?

CORDELIA Nothing.

LEAR

Nothing will come of nothing. Speak again.

CORDELIA 

Unhappy that I am, I cannot heave

My heart into my mouth. I love your majesty

According to my bond, no more nor less.

LEAR

How, how, Cordelia! Mend your speech a little

Lest you may mar your fortunes.

 

p.597-598

 
 

'Nothing, no more nor less' 라니...

코딜리어가 불러온 나비효과에 새삼 유시민 작가의 '위선조차 없는 사회가 된다면'이 떠오르는 대목. 

'How, how,' 되뇌는 리어의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쯤되면 'Nothing bird' 코딜리어의 고고한 결백에 망할년 소리가 절로 나올만도 하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샤일록의 딸한테도 비슷한 욕을 했던 것 같은데; 

 

딸-거너릴의 배신과 최초로 맞닥뜨린 직후 리어의 한탄은 운율의 결을 느낄 수 있는 원문이 더 절절하고 가슴 아프다. 

 

LEAR

Does any here know me? This is not Lear.

Does Lear walk thus, speak thus? Where are his eyes?

Either his notion weakens, his discernings

Are lethargied - Ha! Waking? 'Tis not so!

Who is it that can tell me who I am?

 

p.632

 
 

과연 영국이 '우리에겐 셰익스피어가 있다'고 으스댈만 하다.

은유와 수사를 기가 막히게 잘 다루고 운문을 이보다 더 잘 쓸 수 있을까 싶은 경이로운 셰익스피어의 문학적 재능을 21세기에도 여전히 누릴 수 있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

 

 


* 원래는 시공사 RSC판까지 읽고 리뷰할 계획이었는데 연이어 두 권을 읽고나니 다른 글이 급땡겨서 시공사는 다음으로 밀려났다. 

*1등 독식 로또벼락을 맞으면 기필코 전세계 셰익스피어 판본을 모으리란 꿈 같은 계획은 여전히 현재진행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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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비극 중 첫 독서가 '리어 왕'이 된 건 을유 탓이다. 맥베스가 앞 순서였다면 맥베스가 첫 주자가 됐을 거란 얘기.

사실 가장 읽고 싶었던 건 '맥베스'였다는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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