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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10601 bytes / 조회: 4,321 / ????.09.02 15:00
[도서] 행복의 조건 / 박우정


- 05년, 모 사이트에서 읽음

모 사이트의 '리뷰'게시판의 소동을 보고 다른 관점에서 <행복의 조건>을 읽음ㅡ 이라고는 하지만 그냥 자의적인 해석과잉이다.

연재 완결 후 출판물을 읽지 않았지만 여러 리뷰를 통해 연재 때와 비교해 수정이 거의 없었다고 판단되므로 연재 때 읽었던 것을 중심으로 쓴다. (거짓말 같겠지만 우리 동네 책대여점엔 로맨스 소설이 없다.)

분류상 장르 문학은 장르에 따라 그에 따르는 정석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나아가 작가와 독자 사이의 암묵적인 합의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로맨스소설은 멋있는 남자 주인공과 그에게 사랑받는 여자 주인공의 순애보적인 혹은 열정적인 러브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이야기가 유치하든, 배꼽을 잡게 만들든 혹은 피폐하든 간에 잠을 설치게 만드는 멋진 남주, 대리만족을 충족시켜주는 여주는 말하자면 로맨스소설이 로맨스소설이게 하는 불문율이다. 물론 그들이 종래에는 사랑을 이루고 행복하게 사는 ever after여야 함은 말 할 것도 없다.
<행복의 조건>은 그런 점에서 로맨스 소설의 공식에 철저하게 부합되는 스토리 구조를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장르에 지극히 충실한 ‘정통’ 로맨스 소설이다.

남자 주인공 김우진은,
한 가지를 제외하곤 모든 것을 다 가졌다. 여기에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이란 물론 자본주의의 부산물들이다. 완벽한 외모, 뛰어난 경영 능력, 리더십, 성적 테크닉까지 다 가진 그가 가지지 못 한 유일한 한 가지는 바로 ‘애정’. 김우진은 물질적으로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정신적으로는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하여' 심각한 애정 결핍을 간직한 인물이다. 한 마디로 그는 정서적 장애자인 셈.
여자 주인공 이문영은,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여의었고, 유일한 의지처인 의붓 아버지는 투병중인데다 계모와 의붓 언니로부터는 물질적, 정신적 핍박을 받으면서 고단한 생활을 하고 있다. 의붓 언니의 화려한 외모와 비교하면 문영의 외모는 평범하며 게다가 한 쪽 다리가 3.9cm가 짧은 장애까지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육체적 장애마저 엄마가 남겨준 애정의 흔적이라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다.

육체적, 물질적으로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정서적 결함을 가진 남자와 육체적, 물질적으로 가진 것은 보잘 것 없지만 건강한 정신를 소유한 여자가 만났을 때 승자는 누구일까. 두 말할 것도 없이 '물질을 앞서는 정신의 가치'는 인류의 보편적인 지향점이 아닌가. 문영이 이후 주식으로 제법 돈을 모았다고는 하나 이 부분은 일단 넘어가자. 어차피 우진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므로.

우진은 만남의 초반부와 결혼한 이후 중반부까지는 그가 가진 것으로 문영을 압도하지만 그의 물질적 권력이 힘을 발휘하는 것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그녀를 자신의 영역으로 데려오는 데까지다. 우진이 가진 '물질'로는 그녀의 정신세계까지 지배하지 못 하고 그도 이런 사실을 잘 알기에 문영을 가치를 깨닫고 그녀에게 익숙해질수록 점점 불안해한다. 우진은 비로소 자신이 가진 것은 사실은 하찮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이제껏 자신의 인생에서 빠져 있던 중요한 그 무엇을 문영만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왜냐? 그는 똑똑하니까. 우진은 초조해지기 시작하고 그들 관계의 권력 구도는 역전이 된다. 3년이라는 기간으로 묶여 있는 결혼의 계약 조건이 불안해진 우진은 자신의 물질적 능력을 동원해서 문영의 마음을 얻으려고 한다. 그리고 노력한 보람(?)이 있어 이제 문영은 조금씩 자신에게 마음을 여는 것 같다. 우진은 행복하다.

이쯤에서 드디어 한 때 모사이트의 리뷰게시판을 시끄럽게 했던 내용이 등장한다. 바로 부부강간인데, ‘부부강간’이라는 부분이 왜 이 시점에서 등장해야만 했는지 우선 그 전후의 내용을 살펴 봐야 할 것 같다.
이즈음, 사랑을 해 본 적이 없는 남자와 사랑받지 못할 팔자라고 위축되어 있는 여자는 서로를 믿지 못한다. 그래서 문영은 우진을 떠나려고 하고, 우진은 문영이 자신을 떠날까봐 전전긍긍 한다. 실상 문영은 우진 몰래 그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를 이미 사랑하기 시작한 문영으로서는 ‘소설의 흐름상 그렇게 해야 되기 때문에’ 우진을 떠날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악재와 계속해서 맞닥뜨리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우진은 우연한 기회에 문영의 계획을 눈치 채게 되고 그 때까지 자신을 짓누르던 불안감이 현실화되자 폭주하게 된다. 지극히 초보적인 방법으로 문영을 자신의 곁에 묶어 두려고 했던 것.

개인적인 의견은, 여기까지 글을 끌어오면서 소설은 자연스러운 스토리의 흐름을 타고 있었고 이어지는 내용도 소설의 전개상 충분할 정도의 개연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보이므로 작가가 단순히 흥미를 위한 이유로 문제의 장면을 쓰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해서 문제의 장면은 일방적으로 매도당하기엔 내용의 전개상 이 에피소드가 차지하고 있는 역할이 매우 분명하다.
문영이 떠나고 홀로 남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사랑하는 여자에게 버림받았다는 절망, 자신을 떠나려는 여자를 붙잡는 방법을 달리 알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우진의 광기 어린 행동은 그저 ‘강간 폭력’으로만 치부하기엔 좀 더 다층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문영의 성품으로 미루어 그녀가 임신을 하게 되면 자기를 떠나지 못 할 거라는 지극히 ‘단순한’ 판단이 우진으로 하여금 가장 원시적인 반응, 즉 '폭력에 가까운 물리력'을 사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마치 아이가 원하는 것을 막무가내로 떼를 써서 얻어내려고 하는 것처럼. 한 마디로 "얼마면 돼! 얼마면 돼냐고!" 하던 것이, "맞고 나랑 살래, 그냥 나랑 살래"가 되는 것이다. 선녀를 붙잡아 두려고 아이 셋을 낳은 뒤에야 선녀에게 날개옷을 내놓는 나무꾼은 남자들의 영원한 로망일지도 모른다.

만약 이 소설이 분류상 '현대문학'으로 분류되어 문학적 비평을 받는 위치에 놓여있었다면, 문학의 사회 고발적 측면에서 <행복의 조건>의 '부부강간' 에피소드는 글의 흐름과 문맥상 단순히 힘의 논리에 기대어 문영을 성적으로 학대하고 거기에서 쾌락을 구한 것이라기 보다는 ‘정신적 가치앞에 무기력한 물질적 가치의 전복’으로 이해하는 수준으로까지 이를만 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 소설은 장르 소설, 그것도 로맨스 소설인 것이다. 연인의 사랑은 아름답고 지고지순해야 하고 작가-독자간 암묵적 합의인 판타지를 거스르면 안 된다.
결정적으로, 아마 한 편인가 두 편에서 짧게 다루어진 걸로 기억하지만, 정작 성애적 행위의 묘사보다는 광기어린 우진의 심리가 진지하고도 심층적으로 다루어졌다는 점에서 문제의 장면이 당시 꽤 많은 독자들이 분노했던 것처럼 단순히 말초적 자극과 흥미 유발을 의도했다거나 야설이라던가 강간소설 등으로 매도당하는 것은 작가 입장에서 억울할 수도 있겠다. 성애 장면이 상당히 에로틱하고 관능적으로 다루어진 전반부와 비교해서 읽어 보면 그 차이를 더욱 확연히 알 수 있다.

<행복의 조건>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것은 오히려 이후의 내용이다. 많은 비난과 질타를 의식한 것인지 아니면 작가 스스로 딜레마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소설은 이후 어쩐지 구심점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을 준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스커트를 자꾸 끌어내리는 모양새 같다고나 할까, 이때까지 이야기가 기대고 있던 두 사람의 캐릭터가 지지부진해지기 시작하면서 경영권을 둘러싼 음모를 중심으로 여느 흔한 로맨스 소설의 구도를 그대로 따라간다.
이슈를 불러 일으켰던 ‘부부강간’ 역시 좀 더 진지한 고찰이 이루어졌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구성상 절정의 역할을 하는 데 만족하면서 이 소재를 비난하던 독자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는 형세가 되어버렸다. ‘사건’ 직후까지 우진과 문영이 서로에게 결핍된 부분을 보완하고 보충해주면서 행복을 향해 조밀하게 다가가던 호흡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막상 ‘사건’ 이후 부부가 어떻게 화해하는가 하는 것이 온통 관심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 이 소설은 어디까지나 장르 소설, 연애 소설인 것이다.

우진에게 “사랑해”라는 한 마디를 가르치기 위해 애쓰는 문영이나, 우진이 매일 아침 문영의 아파트 현관 앞에 뭔가를 갖다 놓는다는 식의 에피소드가 지루하고 도식적으로 다가온 사람은 나뿐인지도 모르지만 <행복의 조건>은 그것이 비록 전형적인 장르적 공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하더라도 흥미진진한 이야기 구조와 기승전결을 정석대로 밟아 가는 작가의 글 솜씨가 감탄을 자아내는 소설임에는 틀림없다.

끝으로 당시 리뷰와 리뷰에 달리던 많은 댓글을 보고 느낀 것을 도스토예프스키의 문장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 글을 끝낸다.

'인간은 자신의 도덕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자신의 이웃을 감금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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