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 마지막으로 남은 시체』 > Review

본문 바로가기
Login
NancHolic.com 감나무가 있는 집 Alice's Casket 비밀의 화원 방명록
Review
-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6821 bytes / 조회: 744 / 2024.03.06 16:00
[도서] 『지구에 마지막으로 남은 시체』


20240309042641_682624d65019d91e721f9770e3eb73e1_i4ah.jpg

 

지구에 마지막으로 남은 시체ㅣ레이 브래드버리

 

   

20240306161156_682624d65019d91e721f9770e3eb73e1_xq2p.jpg

 

 

2349년 무덤에서 튀어나온 윌리엄 랜트리는 1933년에 죽은 자다. 416년 만에 마른 땅을 딛고 선 윌리엄은 숨을 쉬지 못하고 그로 인해 자신의 죽은 몸을 인식한다. 그러니까 무덤에서 나온 윌리엄이 인지한 건 죽음이 아니라 '죽은 몸'이다. 이 설정이 꽤 인상적인데 좀비가 냄새는 못 맡으면서 소리는 귀신같이 포착하는 배경을 알 것도 같고.

 

이처럼 죽음을 설명하는 수식어는 많지만 레이 브래드버리는 (이 소설에서)삶과 죽음을 구분하는 증명으로 숨을 쉬는 것 그러니까 '호흡'을 선택한다. 호흡을 하지 못한다는 건 폐가 기능을 못한다는 것이고, 폐가 기능을 못한다는 건 피가 심장으로 모이지 않는 걸 의미한다. 결국 '호흡'보다 더 극명하게 '죽은 몸'을 설명할 수 있을까.

 

제목이 스포하듯 무덤 밖으로 튀어나온 윌리엄 랜트리는 지구에 남은 유일한 시체다. 2349년의 지구는 더이상 시체를 땅에 묻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묻혀있던 시체도 꺼내어 소각하기 때문이다. 

소설은 윌리엄 랜트리의 외로움에 대해 직접적으로 얘기하지 않지만 살아있는 자들 사이에서 떠도는 윌리엄의 행적은 얼핏 외로움이 지르는 비명처럼 보인다. 도시를 혼란에 빠트리는 계획이나 아직 무덤이 남아있는 화성으로 가려는 결심도 결국은 유일한 시체가 되지 않으려는 간절함의 발로인 것이다.

 

 

20240306155957_ddad933b553d9b021a8b728c0e2b0a32_p9q9.jpg


 

공포가 없는 시대는 어떤 느낌일까. 

윌리엄 랜트리는 자신이 생전에 즐겨읽던 고딕/호러 소설이 불태워졌으며 이제 아무도 찾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더불어 그가 무덤에서 뛰쳐나온 세상은 의심과 불신과 두려움이 없는 세상이라는, 알고 싶지도 인정하고 싶지도 않은 사실과 직면한다.

 

 

"끔찍하군요."

사서가 대답하고는 코를 찡그리며 말을 보탰다.

"소름 끼쳐요."

"예. 소름 끼치죠. 사실 가공할 수준이죠. 그의 작품을 태워버렸다니 잘됐네요. 불결하니까요. 그런데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은 있나요?"

"섹스에 관한 책인가요?"

랜트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아닙니다. 사람 이름입니다."

사서는 파일을 넘겼다.

"그도 역시 소각되었네요. 에드거 앨런 포와 함께."

"마켄과 덜레스라는 사람은요? 앰브로즈 비어스라는 사람도 마찬가지인가요?"

"예."

사서는 대답하고 파일 캐비닛을 닫았다.

"모두 태웠어요. 속 시원하게 없애버렸죠."

사서의 얼굴에 이상하리만큼 따뜻한 관심의 표정이 떠올랐다."

pp.47-48

  

우리는 얼마나 크게 울부짖을 것인가. 세상은 우리를 깨끗이 없애버리겠지만, 우리는 가는 길에도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말할 것이다. 공포를 깨끗이 지워버린 이 세계에 대해 떠들 것이다. 암흑 시대에서 온 검은 상상력은 어디로 가버렸느냐고 물을 것이다. 로켓의 시대이자 소각로 시대 사람들은 옛 10월의 오싹함과 기대감, 서스펜스를 짓밟아 뭉개고 불태워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파괴하고 말살했다. 이제 그 자리에는 두려움 없이 열리고 닫히는 문과 공포 없이 커졌다 꺼지는 조명이 들어섰다. 우리가 한때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할 수있다면 우리에게 핼러윈이 어떤 존재였는지, 에드거 앨런 포가 누구였는지, 병적인 암흑을 얼마나 찬미했는지 기억할 수만 있다면!

pp.121-122

 


화자를 벗어나 작가의 목소리가 직접적으로 느껴졌던 대목이다. 지구에 마지막 남은 시체란 어쩌면 고딕 호러 소설의 은유였던가 싶었던, 혹은 한 시대가 저무는 건 그 시대가 향유했던 문화의 몰락을 의미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건가도 싶었던.

 

브래드버리의 소설에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씁쓸하고 쌉쌀한 맛이 이 짧은 단편에서도 여지없이 느껴진다.

 

 

-

레이 브래드버리에게 '10월'은 어떤 의미일까. 문득 궁금하다.

 

* 댓글을 읽거나 작성을 하려면 로그인을 해야 합니다.

Total 347건 1 페이지
Review 목록
번호 분류 제목 날짜
347 도서 몽상가들의 페이지 『사랑의 책』 24.07.17
346 도서 공포와 매혹 『난 지금 잠에서 깼다』 24.07.10
345 도서 그날 밤이 불러온 온 과거의 역습 『한밤의 도박』 24.07.03
344 도서 에꼴 드 경성 『살롱 드 경성』 24.06.11
343 도서 의미와 무의미의 소묘 『보통 이하의 것들』 24.06.04
342 도서 상실과 결핍의 변증 『원도』 (스포) 24.06.02
341 도서 '그리고 한 문장이 남았다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24.05.20
340 도서 느린 호흡으로 읽은 책 『새벽과 음악』『건너오다』 24.05.17
339 도서 팬들에게 보내는 '안녕' 『숲속의 늙은 아이들』 24.04.21
338 영상 너의 기쁨이 나의 행복이 아닌 비극 <페어플레이>(2023) 24.03.10
도서 『지구에 마지막으로 남은 시체』 24.03.06
336 도서 『갈대 속의 영원』 24.02.14
335 도서 『문학이 필요한 시간』 24.02.13
334 도서 서머 4 24.02.10
333 도서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조국의 시간> 24.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