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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8156 bytes / 조회: 85 / 2024.06.04 15:06
[도서] 의미와 무의미의 소묘 『보통 이하의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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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하의 것들ㅣ조르주 페렉 (김호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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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결론부터...

조르주 페렉의 산문을 읽는 매순간 순간이 내겐 '문자의 폭격'이었다.

문자는 언어로서의 기능 외에도 기호로서의 기능이 있는데 페렉의 산문은 후자에 해당한다. 문학에서 기호로서의 문자는 어떤 위치에 있는가. 감성언어가 아닌 기술언어라는 의미에서 <보통 이하의 것들>에 국한했을 때 승자는 작가도 독자도 아닌 역자다. 역자는 '역자노트'를 통해 작가의 기호를 독자에게 언어로 전달하는데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페렉의 산문과 역자노트가 한묶음으로 이어지는 구성인 이 책을 좀 더 편하게 읽는 방법으로 역자노트를 먼저 읽기를 권함. 나는 이 유용한 방법을 늦게 깨달았는데 '책상 위 사물들'을 예의 페렉의 방식- 병렬식 나열을 목록화한 「스틸 라이프/스타일 리프」 를 읽고서였다. 페렉이 문자를 기능적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그로 인한 산물은 언어보다 기호에 근접한다고 확신했던 것도 역자노트 덕이다. 그런 점에서 특히 「스틸 라이프/스타일 리프」챕터 역자노트는 성실하게 정독할만 하다.

 

애초에 페렉은 일찌감치 서두에,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 우리가 경험하는 것, 나머지인 것, 모든 나머지 것, 그것들은 어디에 있을까? 매일 일어나고 날마다 되돌아오는 것, 흔한 것, 일상적인 것, 뻔한 것, 평범한 것, 보통의 것, 보통-이하의 것, 잡음 같은 것, 익숙한 것, 어떻게 그것들을 설명하고, 어떻게 그것들에 대해 질문하며, 어떻게 그것들을 묘사할 수 있을까?'(pp.16-17)라는 질문으로 이 책의 정체와 그의 글쓰기 방향에 대해 선명하게 밝혔다. 그럼에도 나는 페렉의 경고를 무시하고 내가 알고 우리가 아는 '산문'을 읽으려고 했던 거지. 하지만 현실은, 우리 주변에 당연한 듯이 존재하는 보통 혹은 보통 이하의 것들을 낱낱이 묘사하고 나열한 리스트의 향연에 흡사 거대한 엑셀 시트를 정독하다 주화입마에 드는 자신을 발견한다. 

결국 타인의 목록을 읽는 행위에 의미와 무의미를 따지는 고민을 던져준 것이 페렉의 산문을 완독한 의의라면 의의라 하겠다.

 

페렉은 주변의 사물을 해체하듯 낱낱이 늘어놓는데 이 행위는 단발성에 그치지 않고 긴 시간 반복적으로 이루어진다. 페렉의 개인적인 서사를 간직한 '빌랭 거리'의 경우 무려 6년에 걸친 관찰 묘사를 엽서 형태로 기록을 남기는데 원래는 12년이었던 게 내부 사정으로 6년으로 단축된 것이다.

 

특징적인 변화가 없다는 점에서 지루하게 느껴지는 반복 작업의 순환, 곧 페렉 리스트를 쫓아가노라면 있던 게 없고 없던 게 슬그머니 껴 있는 걸 발견한다. 영화 작업에도 참여했던 페렉은 시간의 영속성을 이런 무지막지한 반복의 틈을 비집고 끼어든 사소한 변화를 캐치하는 것으로 붙잡아둔 것이다. 

 

이 책은 국내에서 출간 두 달여 만에 무려 5쇄를 찍었는데 아마도 나는 발견하지 못한, 독자 대중이 희구할만한 뭔가가 이 책에 있었겠지만, 더하여 분류하고 나열하는 페렉의 작업이 의미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쉽게도 페렉의 목록을 읽는 과정이 내겐 의미와 무의미의 지독한 줄다리기였다. 나는 프랑스 어느 쇠락한 동네의 변천사가 하나도 궁금하지 않고, 페렉의 책상과 서랍 속에 뭐가 들었는지 관심 없으며, 페렉이 1974년 한 해 동안 어떤 유동식을 먹었는지도 전혀 내 알 바 아니다. 이 무의미한 독서를 계속해야 하는가, 스스로 씨름하는 동안에도 씹어먹듯이 페이지는 어찌저찌 넘어가고 결국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했을 때 잊고 있었던, 살면서 실감할 일이 거의 없는, 시작하면 끝을 보는 내 근성에 박수를 보냈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페이지는 책 끄트머리에 등장하는 작가 연보였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중성적인 글쓰기'라는 개념을 발견한 것도 득이라면 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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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사물들에 대한 끈질기고 세밀한 묘사는 페렉의 글쓰기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다. 페렉은 다수의 소설과 산문에서 거의 예외적이라 할 만큼, 가끔은 병적이라 느껴질 만큼 고집스럽고 치밀한 사물들 묘사를 보여주었다. 

-p.194


그의 목록은 일반 목록이나 리스트들과 달리 그 배열에 있어 어떠한 순서도, 논리도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물들에게 일종의 '존재론적 평등성'을 부여한다. 또한 목록은 가능한 많은 사물들을 명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반 텍스트들의 서사나 묘사에서 배재되는 수많은 나머지들의 존재를 환기시켜줄 수 있다.

-pp.197-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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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데 문득 단어 하나가 눈에 걸렸다. 나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책 읽다 말고 일어나서 문구 서랍을 열어보니 역시나 있다. 주인공은 'STAEDTLER' 지우개. 평범한 일상의 틈을 벌리고 찾아든 짧지만 재미있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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