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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9197 bytes / 조회: 324 / 2024.07.10 16:01
[도서] 공포와 매혹 『난 지금 잠에서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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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금 잠에서 깼다ㅣ안토니 포고렐스키外 (김경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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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는 세 번째 목차 「입체경」을 읽던 중에 리뷰에 쓰려고 폰에 메모한 내용이다. * 오타 주의

 

그 어둠은 저 멀리에 있던 구석 곳곳에서 한층 더 짙어졌다. 그리고 나는 모든 미지의 세계와 공포의 세계가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욕망에 못 이겨 가끔은 일부러 그 캄캄한 곳으로 발걸음을 돌리기도 했다. 그곳이 어디였는지 확인하고 기억해 내기 위해서였다.

 

p.81,「입체경」

 

 

메모에 등장한 '81p, 첫 문단'. 두려워하면서도 공포를 기웃거리는 인간의 심리도 결국 욕망의 기저에 도사린 본성의 일부가 아닐까 생각하게 했던 문장이다.

 

차를 점검하는 동안 챙겨 간 러시아 고딕 단편집 『난 지금 잠에서 깼다』를 읽었다. 이미지는 책을 읽던 도중에 내 기억력을 믿지 못하여 폰 메모장에 메모한 내용으로 이미지에선 잘렸지만 메모 일자가 06.25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근 2주 만에 메모를 보는데 낯익은 듯 낯설다. 역시 못 믿을 건 기억이오 믿을 건 메모 뿐.

 

『난 지금 잠에서 깼다』는 사전적 의미 그대로 정통 고딕소설이다. 

'고딕소설'이란 '로맨스 요소가 섞인 공포소설 장르'를 의미한다. 내 기준, '고딕소설'이라고 하면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과 셜록 홈즈 시리즈가 먼저 떠오른다. 특히 셜롬 홈즈 시리즈는 고딕소설의 클래식이라고 생각하는데 러시아 작가들의 고딕소설을 읽노라니 문득 이 장르의 원형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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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작가 11인의 열두 개 단편을 실었는데 모두 재미있고 흥미롭지만 그중 인상적인 단편을 꼽자면 표제와 동명인 「난 지금 잠에서 깼다」「입체경」「상상」「쥐잡이꾼」등으로 이들 단편은 공통적으로 카프카와 포를 연상시킨다.

 

발레리 브류쇼프의 「난 지금 잠에서 깼다」는 소설 전체가 에드거 앨런 포 적(的)인데 정신분열을 앓는 1인칭 화자의 불안심리가 자아내는 역동적인 광기가 인상적이다. 문득 히치콕의 공포 작법이 에드가 앨런 포에게서 빌려온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쥐잡이꾼」은 카프카를 떠올리게 하는데 정확히는 스티븐 소더버그의 영화 <카프카>가 떠오른다. 카프카의 소설- 정확히는 내용보단 소설의 난해함과 혼란을 영상화한 것으로 소더버그의 장기인 감각적인 촬영기법이 감탄을 자아내는 잘 만든 영화인데, 문 하나를 넘는 순간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한 미궁에서 헤매는 '나'는 이유도 원인도 모르는 채 정체불명의 무엇에 쫓기다 공간 밖으로 뱉어지는 순간 현실로 복귀하는 플롯이 비슷하다. 무엇보다 기승은 분명하나 전결은 소설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오리무중인 카프카 식 불안과 혼란을 「쥐잡이꾼」에서도 만끽할 수 있다.

 

「상상」은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다룬 주제를 소환시키는데 '미래를 본 인간의 딜레마'의 원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테드 창과 비하면 훨씬 투박하고 느슨하지만 이 소설이 1906년에 쓰였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이외에 뮤지컬 영화로도 제작된 알렉세이 톨스토이의 「칼리오스트로 백작」은 고딕소설의 정의에 걸맞게 '공포+로맨스'에 충실한 소설인데 고전적인 서스펜스 로맨스 (흑백)영화 한 편을 본 기분이 든다. 

 

 

다음은 잠들기 전 틈새 독서로 펼쳤다가 너무 재미있어서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게 했던 크르지자놉스키의 「스틱스강 다리」의 초반 장면.

 

틴츠는 순간 눈을 번쩍 뜨고 베개에서 머리를 뗀다. 파란 전등 갓 아래, 설계도 아래쪽 가장자리에 두꺼비 한 마리가 틴츠의 시선에 정면으로 향한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앉아 있다.(중략)

틴츠는 소리를 지르며 꿈쩍도 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툭 불거진 두꺼비의 두 눈동자를 외면하고 싶었지만, 두꺼비는 꿋꿋하게 동공에서 힘을 빼지 않고 선수를 친다. 두꺼비의 주둥이가 움찔거리더니 무엇보다도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꾸르륵대는 울음소리 대신 인간의 말소리가 새어 나온다.

"실례지만 여기서 죽음까지 가는 길이 멉니까?"

흠칫 벽 쪽으로 물러난 틴츠는 어리둥절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두꺼비는 틴츠의 침묵이 끝나기를 기다리더니 물갈퀴가 있는 발을 쩍 벌리며 화가 난다는 듯 살짝 몸을 흔든다.

"제가 결국 길을 잃었네요."

말하는 두꺼비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낭랑하다. 기다란 주둥이의 축 늘어진 입꼬리에는 진심으로 억울하고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침묵이 흐른다.

 

-pp.398-399, 「스틱스강 다리」

 

 

해당 내용을 M에게도 읽어줬는데 반응이 너무 잠잠해서 다시 강조했다. 

 

감 "두꺼비가 길을 잃었다니까?"

M "……."


내가 아는, 문학에 등장하는 두꺼비 중 가장 섹시한 이 두꺼비는 스틱스 강바닥에서 뛰쳐나왔는데 무려 헤겔주의자다. 그리고 헤겔주의자의 등장에 걸맞게 「스틱스강 다리」는 제목부터 엔딩까지 내내 지적이고 관념적이다.

 

'러시아 고딕소설'이라는 흔치 않은 독서 경험을 준 출판사를 응원하며 이런 책이 대중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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