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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13240 bytes / 조회: 274 / 2024.07.17 01:01
[도서] 몽상가들의 페이지 『사랑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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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책ㅣF.S. 피츠제럴드 外

 

 

제목은 '관찰자와 몽상가라는 이중의 삶'(pp.422-433)에서 빌려왔다.

 이번에 대출한 『사랑의 책』과 『죽음의 책』은 현대문학 단편선 시리즈에서 '사랑', '죽음'를 주제로 선별한 앤솔로지다.

 

수록 작가를 가볍게 훑어보자면,

 

모파상, 오 헨리는 작가를 모르고 읽어도 소설 첫 머리부터 살랑살랑 풍기는 기시감에 '오, 아는 작가군' 반가울 거고.

H.G.웰스는, 이 양반은 역시 천재군 싶고.

윌리엄 포크너는 선 굵은 문체가 작가의 지문처럼 느껴졌고.

그레이엄 그린은, 아직 본격적으로 읽기 전인 작가인데 여기 실린 단편 하나로도 이 영국인 작가가 영미 문학에서 이룬 대중적인 성취를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스티븐 킹 가라사대 '소설은 일단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레이엄 그린의 단편이 여기에 딱 부합한다. 책장에 꽂혀있는 그린의 소설을 확인한 건 당연한 수순.

 

생소한 작가군 중 시끌벅적 정신없는 군상극을 펼치는 데이먼 러니언은 검색해보니 아니나다를까 브로드웨이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의 원작자다. 가수의 창법만큼이나 정체성이 정직한 인간들- 소설가들이란...

 

그리고, 사이트 파이크 아바스야느크.

외우는 게 간단치않은 이름을 가진 이 양반은 터키 작가인데 다음은 출판사 책소개의 일부.

 

“러시아 작가들이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면, 터키 작가들은 모두 사이트 파이크의 우산 아래서 나왔다.”

 

터키 문단에서 고골과 비교된다는 아바스야느크의 「정자가 있는 무덤」을 읽은 감상은 고골보다 울프 여사였고 당연히 '왜 고골인가' 궁금해서 다시 저자 소개를 보니 고골에 비견되는 '문학'이 아니라 '문학사적 위상'이다. 뭐어쨌든 고작 단편 하나를 읽고 섣부른 생각이지만, 울프 여사랑 친하지 않은 나같은 독자에겐 아바스야트크가 읽기 전에 용기와 다짐이 필요한 작가라는 인상을 남겼다는 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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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파상 「달빛」



투명한 아침 안개 속에서 긴 계곡, 숲, 강, 마을들이 보이자 나는 황홀한 마음에 손뼉을 치면서 그이에게 말했지. "여보,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에요. 나 좀 안아 줄래요?" 그러자 그이가 어깨를 조금 으쓱하더니, 친절하지만 차가운 미소를 띠며 나에게 대답하더구나. "경치가 마음에 드는 것이 포옹을 할 이유가 되오?"

 

-p.12, 「달빛」

 

첫 번째 목차인 모파상의 소설을 읽던 중 방심하고 있다가 웃음이 픽 샜던 장면이다. 나는 MBTI 신봉자는 아니지만 그중 Ⅰ/E, T/F는 근거 있다고 생각하는데 말하자면 이 부부의 대화는 전형적인 F와 T의 대화다. 나중에 해당 장면을 M에게 들려주었다.

 

"모파상의 소설인데, 부부가 마차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있었어. 그러다 전원 풍경을 보면서 아내가 남편에게 풍경이 너무 예뻐요 나를 안아줄래요? 했더니 남편이 풍경이 예쁜 거랑 안아주는 거랑 무슨 상관? 했단 말이지 그러자 매정한 남편에게 상심한 아내에게 애인이 생겨! 너처럼 극극극F 들은 명심해야 할 교훈이지 깔깔"

 

해당 장면 이후 불륜을 털어놓으며 괴로워하는 언니에게 동생이 '달빛 때문'이라고 위로한다. 놀라운 건 바로 이 지점인데 직전까지 짧은 콩트 같던 소설은 고작 '달빛' 한 단어로 서정 가득한 소설이 된다. 모파상의 '달빛'은 나쓰메 소세키의 달이 되었다가, 체호프의 달이 되었다가 끝내는 정의할 수 없는 사랑이 된다. 

명성은 공짜가 아니구나 싶었던 모파상의 한 방이었다.

 

달빛과 Ⅰ/F의 대화 어쩌고 떠들다 보니 『드뷔시의 파리』(캐서린 카우츠키)에서 나를 박장대소하게 했던 커플이 떠오른다.

 

"말해봐요, 내 사랑. 저 달이 사랑의 꿈을 꾸게 하나요?" 

"글쎄요. 달을 보니 아침에 먹은 멜론이 떠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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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럴드 「현명한 선택 」 


 

원제는 'The Sensible Thing'이다. 

이 단편은 『위대한 개츠비』의 예고편처럼 느껴지는데 발표 연대를 보니 역시 「현명한 선택」이 『위대한 개츠비』보다 1년 앞선다. 그 1년 동안 피츠제럴드의 심경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첫사랑에게 외면당하고 절치부심 성공의 레일 위에 올라 첫사랑 앞에 금의환향한 것까지는 두 소설이 동일한 흐름이지만 첫사랑과 재회 후 조지와 제이는 다른 선택을 한다. 

 

단순 정리하자면 제이 개츠비는 문학적인 선택을 했고, 조지 오켈리는 장르적인 선택을 한다. 다만 「현명한 선택」은 원문은 어떤지 모르지만 일단 번역으로 읽은 소설은 오픈엔딩인데 관점을 살짝 비틀어보자면 「현명한 선택」에서 열어두었던 엔딩을 『위대한 개츠비』에서 닫은 것 같은 혐의가 있다. 그러니 『위대한 개츠비』를 읽을 예정이라면 가급적이면 두 소설을 차례로 연속해서 읽기를 권함.

 

조지와 제이 중 누구의 선택이 더 옳았는가 논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그때의 선택이 그들을 어떤 결말로 데리고 가든 이미 그들의 삶에 깃든 우울은 그들과 평생 함께 할 텐데.


 

땡그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건널목을 지나면서 속도를 높이기 시작한 기차는 드넓은 교외의 풍경을 뚫고 석양을 향해 달려 나갔다. 어쩌면 그녀도 석양을 바라보며 잠깐 걸음을 멈추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옛일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밤이 찾아올 것이고, 그는 그녀와 함께 잠 속으로 빠져들며 예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날의 해 질 녘 어둠은 영원히 태양을 가릴 것이고, 나무를 가릴 것이고, 꽃과 그의 젊은 날의 웃음을 가릴 것이다.

 

p.208, 「현명한 선택」

 

철로가 꺾이면서 기차는 이제 태양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태양은 점점 낮게 가라앉으며 그녀가 숨 쉬었던, 점점 멀어져 가는 도시 위에 마치 축복이라도 내리듯 펼쳐져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마치 한 줄기 바람이라도 잡으려는 듯, 그녀가 있어 아름다웠던 그 도시의 한 조각이라도 간직해 두려는 듯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제 눈물로 흐려진 그의 두 눈으로 바라보기에는 도시는 너무 빨리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그 도시에서 가장 싱그럽고 가장 아름다운 것을 영원히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pp.215-216, 『위대한 개츠비』 / 김욱동, 민음사

 

「현명한 선택」이 『위대한 개츠비』의 산모였구나 했던 장면이다. 연인으로부터 내몰리듯이 올라탄 열차의 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는 조지에게서 석양이 퍼지는 지평선 너머 어딘가를 응시하던 쓸쓸하고 우울한 개츠비의 영혼을 엿본 것 같은, 서러운 비애가 느껴졌던 장면.

 

'위대한 개츠비'는 출간 당시에는 인기가 없어 초판은 오랫동안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2차 대전 중 군인들에게 보급되고 소설을 읽은 군인들이 제대하면서 뒤늦게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궁금하다. 위대한 개츠비의 실패한 연애담을 읽고 제대한 군인들은 좀더 이성적이고 현명한, 자본주의적인 연애를 했을까.

 

 

오 헨리「목장의 보피프 부인』


 

'사랑이야기'라고 하면 으레 장르적인 어떤 것을 기대하기 마련인데 그런 점에서 독자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단편은 오 헨리, 피츠제럴드, H.G.웰스, 알퐁스 도데, 윌리엄 포크너, 그레이엄 그린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이중에서 다시 장르적 공식에 좀더 충실한 단편을 꼽자면 오 헨리 「목장의 보피프 부인」, 피츠제럴드 「현명한 선택」이고. (모두 개인 기준)


오 헨리의 소설은 오 헨리에게 익숙한 혹은 길들여진 독자를 배신하지 않는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커플의 예쁜 이야기.

「목장 보피프 부인」은 전형적인 로맨스소설이다. 단적으로, 할리퀸소설 한 편 읽은 기분.

 

 

운명의 길을 따라간 지네 한 마리가 상황을 밝혀 주었다.

 

p.183, 「목장의 보피프 부인」

 

앞뒤 구르기를 하면서 봐도 오 헨리가 쓸만한 문장이다.

 

 

그리고 레이 브래드버리


 

「4월의 마녀」 는 브래드버리의 연작소설 『시월의 저택』중 「바람 속의 마녀」와 동일한 소설이다. 소설을 읽기 시작한 직후엔 혹시 세시와 톰의 프리퀄 혹은 시퀄인가 했는데 그냥 같은 소설이다. 

『시월의 저택』 리뷰에 세시와 톰의 엔딩을 보겠다는 오기로 예쁜 사오정 같은 이 소설을 완독했다고 썼는데 세시와 톰의 에피소드는 똑 떼어 '사랑의 책' 목차에 넣어도 위화감이 전혀 없는 '사랑이야기'다. 다시 봐도 사랑스러운 아이들... 

바람이 풀잎을 살랑살랑 흔드는 초원 어딘가에서 예쁘게 잘 살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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