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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가 있는 집
달콤한 인생
- 지나가는 생각, 단편적 느낌, 잡고 싶은 찰나들
6319 bytes / 조회: 936 / ????.11.25 06:29
그냥 책이야기


책이 공간을 잡아먹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 법칙을 뒤집을 방법은 없다. 책에 아무리 많은 공간을 할당해도 항상 부족하다. 처음에는 벽을 차지한다. 그 다음에는 발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범위를 넓혀가기 시작한다. 천장만이 그 침공에서 유일하게 무사한 곳이다. 새 책은 계속해서 나타나고, 옛날 책은 단 한 권도 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천천히, 알아챌 수 없는 사이에 책은 모든 것을 압도하게 될 것이다. 마치 빙하처럼. -p.44, <환상도서관>


읽는 순간 아주 절절하게 공감했던 대목.
얼마전에 M과 이북(e-book) 얘기를 나눴는데 요즘 타블렛의 가격이 많이 저렴해지고 제품군이 다양해지면서 이북 시장도 커진 게 확실히 체감되더군요. 저도 아이패드에 이북이 몇 권 있긴 한데 제 경우는 도로 위가 아니면 거의 안 들여다보는 편이에요. 언젠가 썼지만 책이라는 공산품을 좋아하는데는 책의 물성도 포함되거든요. '공간'의 문제만 아니면 우린 아무런 장애 없이 해피엔딩인데 말이에요. 게다가 이제와서 애정이 식기엔 그동안의 역사가 너무 깊고 오래 되어...
                                                                                        난 널 버릴 수 없다... 

제 경우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책'을 가진 건 생후 백일 때였어요. 엄마 얘기에 의하면 백일 선물로 엄마가 6권짜리 그림책을 사주셨다는데, 하지만 제가 그걸 읽은 건 아마 다섯 살이 넘어서였을 거예요. 그 무렵 한글을 깨쳤거든요. 요즘 아이들에 비하면 한글을 깨친 시기가 많이 늦었죠. ^^
생애 첫 책이었던 이 그림책은 이후 대학에 입학하면서 이모 부탁으로 나이차 많이 나는 외사촌동생에게 물려줬는데 지금도 몹시 후회하는 일 중 하나예요. 모든 사람들이 책을 금쪽같이 생각하진 않는다는 걸 불행히도 그때는 몰랐거든요. 사촌은 독서에 전혀 취미가 없는 녀석이었는데 언젠가 책을 도로 가져올 생각으로 얘길 꺼냈더니 이모도 사촌도 책이 없어진 것도 모르고 있더군요. 그때 사촌에게 줬던 책은 그림책을 포함 세계문학전집, 위인전 등 300여 권이었는데 초등학교 입학 전후에 밤낮없이 끼고 살았던 거라 제 유년이 통째로 사라진 것 같아 많이 속상했어요.
깨우친 글자의 세계가 재미있었는지 어쨌는지 그 무렵의(유년기) 저는 정말 책을 좋아했어요. 어렸을 때 엄마는 지인들에게 늘 책 읽는 딸 자랑을 하셨는데(책을 개미똥 보듯 하던 아들은 제외), 친구가 놀자고 불러도 집에 없는 척 책만 읽고, 화장실 갈 때도 밥 먹을 때도 손에서 책을 안 놓고, 꾸벅꾸벅 졸면서도 책 읽고, 친척 집에 데리고 가면 방에 틀어박혀 그 집 책 읽고, 친구 집에 놀러가면 그 집 책 읽고, 병원 델고 가면 병원 책 읽고... 넵, 이 재수없는 꼬맹이가 바로 저였어요. 
저희 남매의 책을 사는 건 엄마의 몫이었는데 초2 때 <플루타르크 영웅전 전집>과 <세계하드보일드 전집>을 사주신 걸 마지막으로 그 해 여름방학 첫 날 엄마는 시립도서관에 저를 버리셨어요.
처음 시립도서관에 갔던 날은 지금도 생생한데...
건물이라던가 풍경 같은 거야 이제 기억도 안 나지만 운동장처럼 넓고 환한 실내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느꼈던 감정은, 이제 생각해보니 그 감정이 바로 '환희'였던 것 같아요. 아, 저 넓은 공간을 모두 책으로 채울 수도 있구나, 세상엔 책이 정말 많구나- 라는, 책과 공간과 셀 수 없는 물량의 상관관계를 보는 인식의 저평이 넓어졌달까... 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고, "맨날맨날 와야지, 문 열자마자 와서 문닫을 때까지 있어야지" 했어요. 어린 저한텐 그 곳이야말로 신세계였고, 천국이었어요.
시기별로 제 독서량은 초 > 중 > 고 = 대학 순인데 특히 이십대 중반엔 독서량이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전공공부 때문에 감성이 삭막해졌는지 어쨌는지 책 읽는 재미가 가장 시들했던 것도 이 시기였고, 책 사는 것에 가장 인색했던 것도 이 시기였어요. 개인적 독서에 사회적 독서가 끼어들면서 죽고 못 살던 사랑도 마침내 권태기가 찾아온 거죠.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십대 후반에 들면서 시들했던 책 사랑이 부활했고 그후론 뭐 쭉 이 모양입니다.
책을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지금도 모르겠어요. 돌이켜보면 책의 물성과 가늠불가능한 상상력의 확장성을 가장 사랑했던 건 초등학생 때였는데 그땐 말그대로 책과 사랑에 빠졌던 것 같아요. 읽어도 읽어도 허기가 지고, 책 냄새만 맡아도 가슴이 뛰고, 책만 있으면 밥 안 먹고도 살 수 있을 것 같고... 그땐 그랬어요. 제가 어릴 때만 해도 놀거리가 별로 없던 시절이라 책이 그 자리를 독차지했던 것일 수도 있고, 상대적으로 지금은 책 말고도 읽을 거리가 넘쳐나는 시대라 책을 통한 독서가 어릴 때만큼 절실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을 테고요. 그래도 결론은 '책이 좋아' 입니다. 가끔 책장을 보면서 한숨을 쉬기도 하지만 책이 없는 우리 집은 상상할 수가 없어요.


'이 글, 정말 공감가지 않나요?' 라고 시작했던 글이 이- 마안- 큼 길어졌습니다. 전 글도 말도 늘 장편급이군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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