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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가는 생각, 단편적 느낌, 잡고 싶은 찰나들
6220 bytes / 조회: 1,068 / ????.03.05 21:00
활자중독 단상


얼마전에 한 여초사이트에서 허세 중 최고 허세는 '활자중독' 이라는 게시물이 올라왔는데 원글과 쏟아지는 댓글을 보면서 뜨끔했다. 활자중독이라고 하면 재수없다, 허세다 라고 생각하는구나, 살짝 컬쳐쇼크가 왔다.

나도 홈에서 '활자중독이에요' 얘기를 두어 번 한 것 같은데... (검색해보니 두 번 했다. 한번은 유사활자중독, 한번은 활자중독.)​

나중에 M에게 이 얘기를 하니 M은 '활자중독이라는 표현이 허세라는 것에 공감한다, 이 표현은 결국 자기과시 욕구' 라고 했다. 일단 활자를 읽는 행위를 금단증세가 따르는 '중독'이라는 병증과 연관시키는 것부터가 오류라는 거다. 활자에 중독될 수는 없다는 건데, 확실히 병증으로 보면 '활자중독'이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어폐가 있는 듯도 보인다. 그런데 꼬리를 물고 드는 의문. 그럼 운동중독은?

 

누가 "나 운동중독이에요." 하면 그것도 운동 많이 한다고 허세부리는 건가?

물론 "전 책을 많이 읽어요", "전 운동을 많이 해요" 해도 된다. 하지만 표현이야 말하는 사람의 재량이지, 그걸 허세다 아니다 타인이 재단하는 태도야말로 오히려 또다른 허세가 아닐런지.

병증과 관계 없는 중독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니 우선 운동중독, 드라마중독 등이 떠오른다.

누가 "나 운동중독이에요", "드라마중독이에요" 할 때마다 허세부리지마- 하지는 않을 거 아닌가. 결국 '허세'가 아닌 '지적 허세'가 꼴불견인 걸까.

 

내가 '나, 활자중독인가 봐' 최초로 인지한 건 밴쿠버에서 일행과 떨어져 혼자 호텔에 남았을 때였다.

집 근처 마트에 갈 때를 제외하면 늘 책을 가지고 다니는데 그때는 일정에 없었던 급히 떠난 여행이라 미리 책을 챙기지 못했다. 다음은 뻔하다. 해가 져서 책을 사러가기엔 이미 늦었고 그땐 스마트폰도 아니어서 정말이지 읽을 거리라곤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유사패닉 상태에 빠진 것. 일단 TV를 켜고 캡션 기능을 켰다. 그리고 룸의 서랍을 뒤졌더니 침대 사이드 서랍에서 holy bible이 나온다. 구조 직후 호텔에서 성경을 발견한 파이가 이후 '세계 호텔객실내 성경 비치 운동'에 기부금 내는 걸 진심으로 이해한 순간이었다.

문맹이 아닌 이상 글자가 있으면 본능처럼 읽기 마련이다. 하지만 활자를 읽을 때 단순히 의미를 해독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 사람도 분명 있다.

 

소설에 국한하면 내가 읽은 고전의 70%는 초딩 때 읽었는데 엄마 취향 덕에 문고판이나 청소년용 편집본이 아닌 완역본으로 읽었다. 전집, 완역, 전작주의에 대한 강박(?) 비스무리한 욕심이 생긴 것도 어린 시절 엄마의 전집 구매를 보면서 자란 영향이다. 딸의 읽는 속도를 감당하지 못한 엄마가 시립도서관에 나를 던져놓은 건 내가 초4 때. 그곳이 내가 만난 최초의 신세계였다는 얘기는 자게 어디에도 썼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도 서점, 도서관인데 그때도 지금도 교보에 던져놓으면 하루종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논다. 위의 시립도서관은 주말마다 엄마가 데려다줬는데 초6 때부터 혼자 다녔고 기억하기로 고1 때까지는 꼬박꼬박, 고2 들어 띄엄띄엄... 그러다 어느날 완전히 발을 끊었던 것 같다.

 

어릴 때 읽은 책과 관련해 좀 특이한 경험으로 기억에 남은 책은 초2 때 엄마가 사다준『플루타르크 영웅전 전집(총 10권)』, 초5 때 아빠가 사다준 헤밍웨이의『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인데 이 두 책을 기억하는 이유가 재미있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은 엄마가 박스에서 책을 꺼내는 걸 보면서 속으로 '이걸 읽기엔 아직 내가 어린데' 생각했고,『누구를 위하여 종…』은 이 소설로 인해 한동안 반강제 휴독에 들어갔기 때문. 이후 헤밍웨이는 내게 재미없는 소설을 쓰는 작가로 찍혔다. 그리고 중1 때『노인과 바다』를 읽은 걸 끝으로 이후 나랑은 죽 인연이 없는 작가였다. 해묵은 첫인상이 바뀐 건 작년에 단편『킬리만자로의 눈』을 읽고서. 읽을 때는 '아 역시 무미건조 재미없다' 했는데 어느날 문득 어느 장면, 어느 문장이 떠오르는 거다. 늦었지만 헤밍웨이식 문장의 맛에 눈을 떴다고 해야할지.

 

해외에 나가면 항상 들르는 곳이 서점인데 기노쿠니야 신주쿠점과 산타모니카의 반즈앤노블은 나름 단골 서점. 그리고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현지에서 꼭 책을 사오는데 이 구구절절 긴 이야기의 결론은 결국 이런 거다.

어떤 사람에게 독서는 단순히 재미있는 취미, 애정이 가는 취미를 넘어 일종의 의무감과 부채감을 동반하는 무엇으로 없으면 안 될, 안 하면 안 될 인연 같은 악연, 악연 같은 인연일 수도 있다는 거.

 

전국민의 취미가 독서일 정도로 책읽는 행위는 특별할 거 없는 흔하고 평범한 행위다. 하지만 그 흔한 행위가 막상 기회비용과 우선순위를 따지는 순간이 왔을 때도 누구에게나 의미가 똑같지는 않을 거다.

 

누가 "나 활자중독이에요." 하면 허세 떨지 말고 그냥 책 많이 읽는다고 해라- 흰 눈으로 보지 말고, 아 저 사람은 책을 무척 좋아하나 보다 생각하면 그만이다. 독서광은 괜찮고, 활자중독은 안 되고 그것도 웃기지 않나. 이거든 저거든 결국 그 사람에겐 '책을 좋아해요."의 또다른 표현일 수도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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