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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가는 생각, 단편적 느낌, 잡고 싶은 찰나들
3701 bytes / 조회: 992 / ????.05.07 00:40
공포에 관하여


얼마전에 M이 "넌 곤지암 못보겠다"고 불쑥 주의를 줬다. 아니, 경고인가?

 

'곤지암'이 어떤 영화인지는 대충 안다. 그러니까 내가 가진 건 표피적인 정보들인데 일단 장르가 공포이고 제목이 '곤지암'이니 아마도 폐허가 된 정신병원이 배경일 것이고, TV에서 얼핏 지나치듯 본 바에 의하면 모큐멘터리인 것 같고.

이 두 가지 정보 중 내가 '곤지암'은 못보겠군 확신했던 것 두 번째 '모큐멘터리' 때문이다.

모큐멘터리(Mockumentary)는 페이크 다큐라고도 하는데 '허구의 상황이 실제처럼 보이게 하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를 의미한다.

본격적으로 대중적인 흥행을 거둔 모큐멘터리가 바로 '블레어 위치'인데 지금껏 내가 본 유일한 모큐멘터리였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다.

'블레어 위치'를 보는 동안 사실 나는 무섭다는 공포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 중간 중간 서늘하군, 섬짓하군- 하긴 했으나 사다코가 우물 속에서 기어나오고 온갖 물귀신 처녀귀신이 내다리 내놓으라고 쫓아오고 눈코입 없는 귀신이 나를 노려보는 동양 공포물에 비하면 관람가 PG수준이랄까.

결론부터 말하면 진짜 공포는 영화가 끝난 후에 찾아왔다.

'블레어 위치'를 본 그날로부터 사흘 간 나는 잘 때 벽을 보고 눕지 못했고, 영화로 인한 공포가 완전히 사라지는데 거의 3년이 걸렸다. 어느날 '어, 이제 안 무섭네' 느꼈던 게 영화를 보고 3년이 지났다는 의미다.

'블레어 위치'는 내게 공포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깨우치는 계기가 됐는데, 인간이 느끼는 공포의 기저는 '보이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깨달음이다. 벽장 속, 닫힌 방, 어두운 늪 아래 등등.

한밤중에 불꺼진 방에서 눈을 떴을 때 어둠에 가려진 모든 것은 공포를 자극하는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벽에 비친 그림자, 가구 사이의 어두운 틈, 닫힌 문 저 너머.

어둠에 기생하는 공포의 기저가 상상력이라면, 공포는 결국 보이지 않는 것을 의식을 동원해 상상하는 일종의 자기학대와 다를바 없지 않겠는가. 빛은 어둠과 함께 공포를 몰아낸다. 어쩌면 공포란 무엇이든 실체화하고 형상화해야지만 만족하는 욕망이 충족되지 않는 불안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당시에 그런 생각을 했다.

 

M의 "넌 못보겠다"에는 반전이 있다. 등장 타이밍이 아닌데 눈 뻘건 귀신이 수시로 확 튀어나온다는 거다. 말이 끝나자마자 tmi라고 호들갑을 떨고 난리를 쳤다. 예전에 택시기사랑 눈빨간귀신 얘기를 듣고 며칠 동안 잠을 설쳤단 말이다.

궁금해서 물었다. "넌 안 무섭디?"

하나도 안 무섭단다. 왜 무섭냐고 오히려 내게 반문한다.

그래서 또 물었다. "그럼 그런 장면 나오면 넌 무슨 생각하는데?"

사람들이 무서워하겠네- 했단다.

그래서 또 물었다. "그럼 넌 귀신의집 그런 것도 잘가겠네?"

어-

...

그만 묻자. 부럽고 열받는다.

참고로 나는 지하철 계단에서 '디 아이' 포스터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기절 직전까지 갔던 전적이 있다.

얼마후에 뉴스에서 공공장소에 공포영화 포스터 부착을 제한한다는 기사를 봤을 때 물개박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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